[Opinion] 뮤지컬 "호프"에 대한 단상 (2) [공연예술]

글 입력 2019.09.0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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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작품의 직접적인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뮤지컬 <호프>는 약자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호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 특히 무력이 곧 권력이 되는 전쟁의 시대 속에서 사회적 약자 집단이 제각기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또 그 선택들이 왜 불가항력적일 수밖에 없는지 관객들에게 연거푸 설명한다.


<호프>를 관람하는 관객들은 작품의 플롯을 천천히 따라가면서 위와 같은 선택들의 연속이 만들어내는 일련의 흐름을 경험할 수 있다. <호프>를 본 수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던 것은, 그러한 경험들이 특정한 지점에서 우리의 삶과 분명히 맞닿아 있다는 점을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에바 호프는 약자이기에, 선택권이 없다. 아빠가 남긴 원고지를 삶의 희망으로 여기고 그에 집착하는 엄마를 원망했던 것도, 엄마를 질책하면서도 험한 세상으로부터 엄마를 보호하려 했던 것도, 원고지에 매달리는 엄마를 두고 떠났던 것도 모두 호프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호프에겐 뛰쳐나간 집에 다시 돌아와 끔찍하게 따뜻한 엄마의 코트를 입고, 70대가 될 때까지 엄마의 말씨를 따라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호프의 인생은 결핍으로 점철되었다. 전쟁 중이었던 사회는 호프에게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 아빠는 자신과 엄마를 두고 떠났고, 원고지와 함께 남겨진 엄마는 타고 있던 마차의 옆자리를 호프가 아닌 원고지 더미에게 내주었다. 호프를 환영하지 않았던 세상은 그의 탯줄과 함께 그가 물려받았어야 했던 모든 관계들을 잘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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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평한 세상에 태어난 그가 완전한 홀로서기를 행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 지 모른다. 마음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호프는 이 고통스런 공백을 채울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녀야 했다. 세상에게 버림받은 호프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없었다. 극단의 절망에 빠졌을 때 그는 용기가 아닌 구원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호프가 엄마에게서 빼앗아 온 원고지를 팔아치운, 자신을 배신한 연인을 내치지 못하고 붙잡은 것은 그가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꺼내준 영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지독한 가난 속에서 돈을 가져다 줄 유일한 ‘희망'인 원고지에 매달리게 된 호프는 자신에게서 무력한 엄마의 모습을 발견하고 절규한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약자들은 절망의 굴레에 갇힐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호프가 법정에 서서 자신의 인생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기억 아래에 덮어둔 몇십 년의 세월을 천천히 톺아본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호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그의 인생에 대한 최초의 고백이다. 호프는 마지막 공판을 앞둔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그는 무대 위에서 가상의 인물인 원고지 K와 싸우고, 그 앞에서 억울함을 토로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옛 기억을 더듬으며 미소를 짓는다.


이 일련의 행위들에는 모두,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대면한 호프의 당혹감과 안도감이 묻어있다. 70대의 호프가 어릴 적 호프의 마음을 소리내어 말한다는 것. 이것은 원망, 혐오, 두려움으로 점철되었던 자신의 과거와의 화해를 의미한다. ‘호프'는 그가 그토록 자기 자신과 같다고 말했던 원고지가 아닌, 에바 호프 자신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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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호프>의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원고지 K의 캐스팅 문제를 꼽을 수 있겠다. K는 이번 공연에서와 같이 꼭 젊은 남성일 필요가 없다. 특히 K가 호프라는 인물의 한 부분으로서 호프를 위로하고, 설득하고, 야단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K는 분명 호프의 일부분인데, 극에서 K는 호프와 완전히 분리된 인물인 듯 보인다. K와 호프 사이의 유대감이 명확히 드러나지도 않을 뿐더러, 두 캐릭터가 갈등하는 장면들은 호프가 내면의 감정에 몰입하여 자기 자신과 싸우는 상황으로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70대가 된 호프와 함께 그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K는 어린아이나 여성 배우가 연기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특히 전자의 경우 호프가 어릴 적부터 애써 외면해 왔던 감정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다음 프로덕션에서는 공연계에서 조금씩 시행되고 있는 젠더 프리 캐스팅이 K의 캐스팅에서 이루어지면 어떨까 한다.


아울러 <호프>의 결말 부분 또한 짚어 보고자 한다. 촘촘하게 엮어진 극의 전반부에 비해 <호프>의 후반부는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듯한 인상이다. 결말부에서 호프는 자기 자신과 완전한 화해를 이루고는, 재판의 승패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듯 뒤돌아 퇴장한다. 호프의 퇴장과 함께 극의 긴장감은 황급히 사그라들고, 무언가에 감화된 듯한 호프의 표정은 어설프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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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호프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받아들이고 온전한 홀로서기를 이루어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법정으로 대표되는 ‘사회'가 어두운 시기를 홀로 살아낸 호프를 수용하고, 위로하고, 인정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점을 일러두고 싶다.


극의 무대인 법정은 작품에서 호프의 주체적 말하기의 공간으로 그려지지만, 법정은 사실 피고인에 대한 심판의 공간이기도 하다.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은 70대가 된 호프에게도 모욕과 비난을 서슴지 않는데, 법정에서 심판받아야 하는 자는 호프가 아니라 그를 아직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우리 사회이다.


힘 없는 자들을 외면해 온 사회가 스스로의 폭력과 태만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호프의 삶은 계속해서 ‘읽히지 않은 인생’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작품은 호프에게 자신의 내면을 이해할 기회와 더불어 자신을 망가뜨린 사회를 용서할 기회를 주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프>는 애정이 가는 작품이다. 상투적인 드라마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빚어낸 <호프>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소외된 자들을 보듬는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감동이 있는 뮤지컬, <호프>의 재연을 기대해 본다.





[이승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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