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 일요일,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 <그리스 보물전: 아가멤논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이하 그리스 보물전) 을 다녀왔다. 이번 전시는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등 그리스 박물관 중 24여 곳의 소장품을 한국 최초로 공개했다.
작품 수는 총 350여 점에 달하고 관람 시간은 어림잡아 한 시간 정도였으니 규모가 큰 전시였다. 주말 오후를 맞아 그리스 보물전을 찾은 이들이 많았는데 단체로 견학 온 아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미술책이나 교과서에서만 보던 유물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일테니 그런 아이들의 들뜸이 느껴졌다.
세계 최초의 해양 문명이자 유럽 최초의 문명인 에게해 문명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까지를 총 망라한 전시는 생각보다 더 방대했다. 사방을 가득 채운 유품들은 깨진 조각을 이어 붙인 자국과 빛바랜 그림들로 세월의 흔적을 말했다. 가끔은 이게 진품인지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보물의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 그 양은 어찌나 많은지, 하나하나 꼼꼼히 보던 초반에 비해 후반으로 갈수록 모든 작품을 면밀히 관찰할 수 없었다.
전시는 신학, 문학, 정치, 종교, 미술 등 9개의 테마로 나뉘었다. 각 테마마다 그에 맞는 배경과 부연설명이 적혀있어 당시 상황에 비추어 관람할 수 있었다. 견학 온 초등학생들도 벽에 새겨진 설명을 한참 살피더니 작품 앞에 가서는 연신 '우와' 거렸다. 그 아이들의 순수한 반응처럼 나 또한 감흥이 남달랐다. 고등학교 미술 시간부터 미술사를 공부한 대학 4년까지 그리스 문명은 미술사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한국인데 두꺼운 서양 미술사책에서나 볼법한 고대 그리스 유물이 눈 앞에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서구 문명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는 그리스 문명의 유물. 그것을 죽기 전에 보는 게 소박한 소원 중 하나였는데 생각보다 빨리 이루었다. 그것도 유럽에 가지 않고서. 비록 이 보물들이 묻혀있던 장소와 대기는 아니지만, 구태여 그리스를 가지 않고도 관람할 수 있다는 건 아주 좋은 기회였다.

우리는 이따금 고대 그리스 문명을 탐구한다. 2000년대 가정에 한 권쯤 있었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 고대 그리스의 신들이 마치 인간처럼 사랑하고 질투, 다툼, 용서, 화해하는 신화를 우리는 현실에 반영하기도 한다. 사랑을 이어주는 행위를 '에로스의 화살'에 비유하고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를 '아프로디테'로 칭송하는 등. 잘 짜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이 신화는 지금까지도 생생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이 올림포스 신들의 이야기는 '그리스' 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주제일 것이다.
역시나 이번 전시는 그 점도 빼놓지 않았다. 허구일지라도 사람들의 인식에 큰 부분을 차지한 이야기를 한쪽 벽면을 할애한 센스에 감탄했다. 올림푸스의 신들의 관계도를 정리한 이 표 앞은 어린아이부터 40대 남성까지 나이를 불문하고 흥미에 찬 눈을 빛냈다. 만약 이것을 빼놓았다면 많은 이가 섭섭할 뻔했다.

이 전시를 흥미롭게 만든 것 중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벽의 색깔이었다. 구역마다 다른 벽의 색은 그 구역의 테마에 맞게 설정된 것 같다. 어느 부분은 색이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도록 은은했고 어떤 구역은 벽지가 먼저 눈에 들어올 만큼 강렬했다.
특히 전시 마지막 구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공간은 시선을 사로잡는 빨간색이었다. 이 색은 이집트,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투철한 정복 정신과 어울렸다. 그의 칼과 갑옷에 수없이 뿌려졌을 살육과 파괴의 흔적이 연상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세월을 원정에서 보내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짧지만 강렬한 생애를 반영한 것 같기도 하다.
이 벽 색깔 하나로 이번 전시의 인상이 좌우됐다고 하면 논리 없는 비약일까. 하지만 나는 그만큼 이 색상을 고른 주최 측의 선택에 짜릿한 인상을 받았다.
전시장 밖으로 나오며, 예능프로그램 <알쓸신잡3>에서 아테네로 여행을 떠난 회차가 생각났다. 유시민은 아테네를 가고 싶었던 이유로 서구 문명의 기원을 알고 싶다 했다. 서구 문명의 빅뱅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알려면 고대 그리스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인류의 4대 문명 중 고대 그리스 문명은 가장 확실히 자리를 잡고 후손에 전파되었다. 성장, 퇴행, 소멸하는 과정 중 대부분의 문명이 소멸한 가운데 그리스 문명만이 명목을 이어나가 오늘날 서구 사회까지 이어졌다. 이 그리스 문명이 발전하여 현재 인류를 주도하는 서구 문명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고대 그리스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와 탐구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를 보며 왜 많은 관람객이 고대 그리스의 유적을 보러 그곳으로 향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했다. 깨지고 부서진 흔적이 많았음에도 그 형태는 성히 보존되어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거치며 위용을 드러낸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을 보며 감탄과 함께 속상함이 밀려들었다. 우리나라의 오천 년 역사도 이렇게 잘 보존되었더라면 지금쯤 세계 곳곳을 순회하며 자태를 뽐내고 있지 않았을까. 그만큼 고대 그리스의 보물들은 찬란했고 온전했으며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