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이 주는 행복과 회환-영원한 나르시스트 천경자展 [시각예술]

글 입력 2019.06.22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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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회환, 너무 다른 말이지만 이 둘은 함께 양립하며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간다. 그 둘의 조화가 곧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술가 자신의 행복과 회한의 흔적이 담긴 전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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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화백은 한국 화단의 대표적 작가 중 하나로 채색화에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어 왔다. 천 화백은 시민들이 자신의 작품을 쉽게 접하게 하도록 60여 년 간 제작한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는데 "영원한 나르시스트, 천경자" 전시는 그중 몇 년간 미공개되었던 작품을 중심으로 30여 점을 선보인 것이다.


전시는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환상의 드라마`, `드로잉`, `자유로운 여자`라는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있다.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화백은 스스로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다고 언급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지울 수 없었다는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화백의 손길로 다양한 채색화로 탄생했다.


천경자 화백은 여성을 주제로 한 채색화를, 특히 해외에서 만난 이국적인 모습의 여인들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화려한 스카프를 쓴 외국에서 마주친 한 여인, 자메이카를 배경으로 한 화려한 옷차림의 여인의 그림은 또렷하며 강렬한 인상이 담겨있는데 해외에 스케치 여행을 하며 작가가 당시 작품 과정에서 느낀 행복과 즐거움이 보이는 듯 하다.


그런데 어느 그림 속 여인들은 -특히 자신을 대상으로 한- 가슴에 장미를 품고, 꽃을 머리에 쓰며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 슬픔을 넘은 공허함이 가득한 눈빛을 지니고 있다. 사랑이 준 아픔과 화가로서 작품활동의 고됨으로 인한 작가의 외로움이 담긴 공허함일 것이다.



환상의 드라마


해당 섹션은 작가의 꿈, 환상, 동경의 세계를 표현한 작품들로 구성되어있다. 한때 사랑으로 인한 슬픔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던 서른 다섯 마리의 뱀이 담긴 "생태"라는 작품과 자신의 고향, 해외 스케치 여행에서 작가가 마주한 이국적인 풍경들을 그리는 작품들, 그리고 그 이국적인 풍경에 자신의 화풍으로 다수의 여인을 담아내 표현한 작품들까지 작가의 인생에서 불행, 행복, 그리고 꿈꾸던 세계를 해당 작품들로 살펴볼 수 있다.



드로잉


채색 화가로 알려진 천경자 화백의 드로잉 스케치를 관람하는 것도 색다를 부분이었다.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드로잉의 대다수이면서도 앞서 언급한 "생태"의 뱀 스케치 및 남태평양을 여행할 당시 작가의 자화상 스케치도 확인할 수 있다.작가의 해외 스케치 여행에서의 이국적인 풍경, 그리고 그 당시 행복했던 작가의 모습이 꽃과 함께 어우러진 작품이다.



자유로운 여자


해당 섹션은 천경자 화백이 집필한 수필집 및 자서전, 해외 스케치 여행의 과정을 기록한 기행화문집 등을 소개하며 몇몇 책의 몇 구절을 인용해 관람객에게 소개하고 있다. 해당 서적들은 출판 당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으며 현재 대부분 서적은 절판되었다고 한다.


전시에서 인용된 부분을 보면 작가는 수필집 및 자서전에서 화가로서 작품활동에 대한 자신의 고뇌, 그리고 앞으로 인생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지를 솔직하게 담아냈다. 아래는 전시관에서 소개한 작가의 수필집 인용 구절들 중 하나이다.



물감을 으깨고 붓을 놀리고 하는 것이 나의 일상생활이니 노상 꿈을 파먹고 산다고 할만도 하다. 웬일인지 해가 갈수록 성미가 더 꼼꼼해져서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무던히도 맴돌고 헤매야 한다. 나의 타고나지 못한 비천재(非天才)의 탓을 한탄도 해 보지만 나일론 깔깔이 같이 기계에서 쉽게 다량으로 쏟아져 나온 것보다는 누에게 뽕을 먹고 자라 실오라기를 뿜어내어 누에고치가 되어 명주나 비단이 짜여 나오는 식으로 모체(母體)의 태반(胎盤) 냄새가 나는 것이라야 한다고 나는 늘 자위해보는 것이다.


천경자,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자유문학사, 1984>



마지막으로 천경자 화백이 생전 작업하던 모습을 재현한 작은 공간이 전시장 입구 겸 출구 쪽에서 볼 수 있다. 생전 고인이 작업하던 모습의 사진을 배경으로 그 자리의 붓, 물감 등 정말 세세한 부분까지 재구성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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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뜬금없을 수도 있겠지만, 고백하자면 필자가 몇 번 해당 전시를 재관람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위에 소개한 작가의 수필집에 담긴 구절 때문이었다. 개인의 인생에서 슬픔과 한 뿐만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작가를 가장 지치게 했던 것은 아마, 이상은 천재의 그것을 추구하지만 자신은 비천재이기에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자괴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차가운 철의 기계에서 완전무결하게 다량생산하는 식이 아닌 누에가 힘겹게 뽑아내는 실오라기가 비단을 만드는 식의 과정이,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 삶을 얻은 이에게 더 어울리는, 아니 당연히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스스로 다독이는 내용이 필자의 마음에 와 닿았다. 필자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힘이 겨울 때마다 위의 글을 떠올리며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


천경자 화백은 "그림 속의 여자는 결국 그린 사람의 분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필자는 앞으로도 그의 꿈, 슬픔, 한의 분신을 마주하러 전시관을 찾을 것 같다. 그림 속 여인의 눈을 마주하며, 그리고 그림을 담은 액자에 비친 나의 얼굴도 마주하며 작가가 담은 분신 속의 새로운 의미를 찾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를 탐구하다가 필자의 인생의 의미도 매번 새로이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며 말이다.



[강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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