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vs 영화

길리언 플린의 장편소설 <나를 찾아줘>는 2012년 출간부터 현재까지 사랑받는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2014년에 개봉한 영화 <나를 찾아줘>는 북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다. 개인적으로 스릴러 장르를 싫어하는 탓에 책을 찾아볼 생각이 없었는데 우연히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감상평을 보게 되었다. 그 게시물은 책 <나를 찾아줘>를 '비혼을 결심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정의했다. 그 한 줄이 다음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게 만들었다.

'남자들은 그걸 최고의 칭찬이랍시고 말하곤 하지 않아? 걘 '쿨한여자'야. '쿨한여자'라는 건 내가 풋볼, 포커, 음담패설과 트림을 좋아하는 섹시하고, 똑똑하고, 쾌활한 여자면서 비디오게임과 싸구려 맥주, 스리섬과 애널 섹스를 좋아하며, 마치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음식 윤간 쇼라도 개최한 듯 핫도그와 햄버거를 입속에다 쑤셔 박고서도 어떻게든 44사이즈를 유지하는 여자다. 무엇보다도 '쿨한 여자'는 섹시해야 하니까. 섹시하면서도 이해심도 많은 여자. '쿨한 여자'는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다. 대신 화가 나도 사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자기 남자가 뭐든 자기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둔다. 마음대로 해, 난 신경 안 써, 나는 쿨한 여자니까.
남자들은'쿨한 여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줄 안다. 어쩌면 너무 많은 여자들이 기꺼이 그런 여자인 척 하므로 속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쿨한 여자'에 분노했다. 난 내 주변 남자들 (친구들, 직장동료들, 낯선 사람들 등등)이 그 끔찍하고 가식적인 여자들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남자를 앉혀놓고 차분하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만나고 있는 건 여자가 아니다, "넌 여자를 사귀는 게 아니야. 당신이 만나고 있는 건 그런 여자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자기한테 키스해줄 거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찌질한 남자들이 각본을 쓴 영화를 지나치게 많이 본 여자다. (중략)
훨씬 더 한심한 건 '쿨한 여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되고 싶은 여자를 연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남자들이 바라는 여자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나는 참을성 있게 -몇 년을-기다렸다. 추세가 역전되어 남자들이 제인 오스틴을 읽기 시작하고, 뜨개질을 배우며, <코스모폴리탄>을 즐겨 읽는 척하고 파티를 주최해 자기들끼리 잘 지내는 동안, 우리 여자들이 음흉하게 지켜보다 '그래, 그는 쿨한 남자야'라고 말하는 날이 오기를.
- 소설 <나를 찾아줘> 中 342~343p
'쿨한 여자'. 남자들은 그걸 최고의 칭찬이랍시고 말하지 않아? "쟤는 쿨한 여자야." '쿨한여자'는 섹시해. '쿨한 여자'는 잘 맞춰줘. '쿨한 여자'는 재미있어. '쿨한 여자'는 자기 남자에게 절대 화내지 않아. 그저 유감스럽지만 사랑스럽다는 듯 미소 짓고 남자 성기를 빨아주지. 내 음모를 죄다 왁싱했어. 아담 샌들러 영화들을 보면서 캔맥주를 깠어. 식은 피자를 먹으면서 44사이즈를 유지했어. 거의 정기적으로 오럴도 해줬어. 그 순간에 충실했지. X나 맞춰줬어.
(중략)
하지만 닉이 게을러졌어. 내가 결혼하길 원했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닉은 실제로 내가 그를 무조건 사랑해주기를 바랐어. 그러고선 땡전 한 푼도 없이 나를 이 촌구석으로 끌고 와놓고선 새로운 젊고 발랄한 "쿨한 여자"와 바람을 피웠어.
- 영화 <나를 찾아줘> 中 에이미 내레이션
의도된 페미니즘

책과 영화 속 에이미가 말하는 '쿨한 여자'는 남자들의 틀에 맞춰진 여자이다. 책에선 10포인트의 빼곡한 글씨로 두 페이지가 넘게 서술되지만, 영화에서는 단 몇 줄의 내레이션으로 채워진다. 다만 다수의 여성을 향한 외침이었던 에이미의 고백이 영화에선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며 운전하는 여성들을 추측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순간 제 옆을 스치는 모든 여성이 학습된 '쿨한 여자'이자 여성 혐오의 피해자인 것이다. 언제나 헌신적이고 아름답길 바라는 뿌리 깊은 여성 혐오 말이다. 에이미는 아름답고 친절하게 꾸며진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줄곧 부모의 <어메이징에이미>와 비교당하며 원치 않게 본인을 소비시켜 왔고 사회적인 아름다움을 찬양받으며 자신을 쿨한 여자로 가두어 온 에이미에게 이미지를 꾸며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게다가 사회가 원하는 아름다운 여성상의 최상인 어머니라는 사회적 지위도 꾸며 냈다. 에이미는 사이코패스 따위가 아닌 사회가 만든 여성 혐오의 피해자였다.
영화 속에는 곳곳에 사회전반에 깔린 여성 혐오를 보여준다. 에이미의 악랄함을 전 애인의 넥타이까지 통제한 전적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본다면 어떨까,
1.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의 짧은 치마 길이를 지적한다.
2. 가슴이 깊이 파인 옷을 입지 말라고 한다.
3. 다른 남자가 쳐다보니 질투가 나기 때문이란다.
4. 그는 독한 남자일까?
행위의 주체만 바꾸었을 뿐인데 한순간에 독한 여자에서 질투하는 남자친구가 된다. 이 생각을 염두에 두고 영화로 돌아와도, 넥타이로 전 애인을 통제한 에이미는 여전히 독한 여자이다. 남자친구의 옷차림을 통제할 만큼 드센 여성, 기가 센 여성이 에이미라는 것을 넥타이 하나로 이해시킨다. 아무리 인식이 바뀌었대도 무의식 속 차별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이것이 바로 개인의 가치관을 떠나 사회적으로 세뇌당한 여성 혐오이다.


에이미가 돌아오자, 드디어 모든 권력이 뒤바뀐다. 에이미 배속의 아들은 닉의 아버지 콤플렉스를 불러일으키고 끝내 자신의 처지에 순응한다. 이러나 저러나 닉이 가장 자신다워지는 순간은 바로 아내 에이미와 있을 때뿐이기 때문에 그녀를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잠든 사이 에이미가 일을 꾸미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편히 잠들지 못한다. 언제나 몇 발 앞서가는 아내가 자신을 나락 끝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닉에게 너를 해지진 않는다는 에이미의 말은 뒤바뀐 권력과 힘을 느끼게 한다. 이로써 에이미의 불면증은 닉에게로, 닉의 모든 권력은 에이미에게로 옮겨간다.
'나'를 찾아줘
에이미를 지켜보는 관객인 우리도 '진짜' 에이미를 알 수 없다. 에이미가 꾸며낸 7년간의 일기장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닉이 정말 에이미를 밀친 것인지, 에이미가 꾸며낸 망상인지 그것도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에이미의 치밀한 계획은 독자와 관객까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영화를 지배하는 에이미의 내레이션은 내내 진실이라는 신뢰감을 주었지만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기준이 불분명해지면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게 된다.
"우리가 지금껏 했던 거라고는
서로에게 분노하고,
서로를 조종하려 하고,
서로에게 상처줬던 게 전부잖아." - 닉
"그게 결혼이야." - 에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