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의 사랑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도서]

김봉곤의 첫 소설집, <여름, 스피드>를 읽고
글 입력 2018.11.10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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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한 첫 게이 소설가"


작가 김봉곤은 스스로를 그렇게 칭한다.

그의 성 정체성은 게이다.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다.


그렇다, 그는 '사랑'하는 남자다.

<사랑>만큼 그와 잘 어울리는 단어도 없다.


그는 단편 <라스트 러브송>에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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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보는 모든 사물과 사람과 사실과 사정과 사건은 그가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지시했다,로 읽어도 좋을까? 과장일까? 하지만 이 소설집 <여름, 스피드>를 읽고 나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랑을 하는 존재다. 그는 사랑을 벗어나 사고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사랑을 사랑해버리는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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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스피드


문학동네의 트위터를 팔로하고 있는 나에겐 꽤 익숙한 소설 제목이었다.  출간 열흘 만에 3쇄를 넘겼다는 화제의 소설. 파격적이고 흥미롭다는 리뷰들은 한동안 꽤 오래 내 타임라인을 채웠다.


2018년 6월, 여름의 시작을 알리며 모습을 드러낸 이 소설집은 제목처럼 여름과 잘 어울리는 글들로 가득했다. 그의 사랑은 뜨겁고 치열하다. 하지만 찰나의 열기. 슬프지만 덤덤히, 무던하면서도 처연히, 그는 사랑을 곱씹고 기억하고 흘려보내고 그러다가도 끝을 조심히 붙든다.



5월의 마지막 목요일 밤, 그와의 사랑이 끝났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다가올 급작스러운 이별들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여름, 스피드> Auto 中



여름이 한참 지난, 이제는 추워서 조만간 롱패딩을 꺼내들어야 할 이런 계절에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이 소설의 공로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해 집어 든 순간부터 난 그저 순리에 따르듯 대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이 책의 첫 장을 읽는 순간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독자의 마음을 요리할 줄 아는 현란한 솜씨를 가졌고 난 완전히 사로잡혔다.


교토의 예술 대학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 <컬리지 포크>는 이 소설집으로의 입성을 환영하는 첫 얼굴로써 안성맞춤이다. 작가 김봉곤을 소개하고 그가 뒤이어 보여줄 작품들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 잘 보여주는 좋은 트리트먼트 같은 소설이다.


이 소설의 화자는 게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모든 화자는 게이다.) 그리고 그는 우연한 계기를 통해 평소 호감이 있던 담당 교수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문학과 남자는 내게 가장 오랫동안 큰 기쁨이었으나 그것들이 이젠 사물처럼만 느껴진다. (p.13)"고 말하던 그에게 새로운 신선한 애정의 자극이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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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리지 포크>는 독자로 하여금 '내가 글자를 제대로 읽은 것이 맞나?'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파격적이고 적나라한 묘사와 대사들로 힘차게 글을 끌고 나간다. 솔직하고 과감하다. 그의 글은 그의 사랑처럼 망설임이 없다.


그는 <컬리지 포크> 이후의 소설들에서도 끊임없이 다시는 사랑에 휘둘리지 않겠다 다짐하고, 사랑에 지쳐있다 한숨을 내쉬면서도 결국은 다시 사랑에 빠지고 휘둘리고 사로잡힌다. 비슷한 패턴의 반복 속에서 그의 소설들은 서로의 구분의 뚜렷하지 않고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그는 시종일관 하나의 입장을 고수할 뿐이다. <사랑>. 그는 게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끊임없이 사랑에 대해 말한다. 사랑을 쓰고 사랑을 논하고, 시작도 끝도 모두 사랑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은 어쩐지 한 문장으로 명확하게 서술되지 않는다. 분명한 주제도 굵직한 메시지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사랑이란 그렇다. 언제부터 사랑에 분명한 주제의식과 대단한 제언과 명확한 개연성이 존재했던가. 원래 사랑은 그의 소설처럼 부유하고 흘러간다. 대책 없이 허물어져도 낭만이라 믿게 되고, 잘 안될 걸 알면서도 가능성에 오늘을 맡겨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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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어둠상자>는 '받는 편지가 적어질수록 더 많은 편지를 쓰게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름, 스피드> 속 화자는 계속해서 편지를 부친다. 보내는 편지에 비해 답신은 아무래도 좀 적다. 그래서 그는 아무래도 좀 외로워 보인다.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동경하고 실체를 손에 쥐고자 하는 그는 몇 번의 무력과 실패를 겪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소설 속에서 취하는 태도는 산뜻함이다. 신파로 이어지지 않는다. 구질구질하지 않다. 담백하고 그래서 아름답다. 아마도 그건, 그가 취하는 사랑에 대한 태도 때문일 테다. 그의 사랑은 비극이 아니다. 그는 그저 계속해서 사랑을 하겠노라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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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사랑에 동의를 보낸다.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해야 하는 수 개의 일을 제쳐두고 불확실한 사랑의 가능성에 몸을 맡기는 그의 낭만을, 마음을 기어코 주고야 마는 그의 대책 없음을 사랑하기로 했다. 사랑을 사랑하는 그의 순정을. 그의 사랑이 기대된다. 기다린다.



소설은 여름을 닮았고, 여름은 소설을 닮았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 나에겐 아직 더 많은 사랑이 남아있다. 그리고 아직 우리의 사랑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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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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