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presentation/representation: 독일현대사진' : 라우렌츠 베르게스와 페터 필러 [시각예술]

'재-제시'의 과정에서 감상자가 느끼는 해석의 자유로움, 또는 유희
글 입력 2017.03.28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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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entation과 representation을 각각 '제시'와 '재현'으로 해석한다면, 사진은 실제에 대한 통상적인 복사물만을 가리킨다고 보기 쉽다. 사진은 현실을 재현한 이미지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재현된 이미지는 각각의 해석이 들어감으로써 다양한 의미들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이미지인 셈이다. 그리고 작가의 예술적 의도에 의해 한 번 더 가공됨으로써 단순한 재현물이 아닌 낯선 이미지로 등장한다. 이와 같이 이미지는 자체적인 의미와 존재 가치를 가지며, 우리는 이러한 representation을 '재 제시'라 부르고자 한다. 즉 '제시'와 '재 제시'란 현실과 이미지의 관계, 현실과 언어, 의미와 언어 간의 이분법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들 사이의 경계를 흐트러트리는 이미지 자체로만 존재하는 독립적 이미지인 것이다.
(출처: '독일현대사진' 전시장)


사진전의 작가들은 독일에서 오래 활동한 중견 작가들이다. 그들은 사진이 대상의 단순한 재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며, 이미지가 그 자체로 해석의 여지를 지니고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참여 작가들 중 특히 라우렌츠 베르게스와 페터 필러의 사진들을 통해 해석의 유희를 크게 느낄 수 있었다. 이 둘의 작품들은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는 아니지만, 둘 다 여러 이미지들이 모여서 넓은 해석의 장을 제공한다.  대상의 특징적인 면모를 담지 않고 작은 것을 통해 큰 공간을 보게 하는 라우렌츠 베르게스와 이미지에 담긴 대상에 대한 설명을 감상자들이 직접 완성케 하는 페터 필러 모두 우리에게 유희를 가져다 준다. 사진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의 해석을 제한하지 않고, 우리를 이미지의 틀 안에서 뛰어놀게 하는 유희의 장. 지금부터 이 둘의 작품을 함께 해석하고, 함께 바라보자. 서로 다르게, 원하는 대로.



라우렌츠 베르게스(Laurenz Ber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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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다면
최소한 사진으로라도 그것을 담고 싶다.'


라우렌츠 베르게스는 탄광촌의 쇠퇴로 주민들이 떠나버린 그들의 옛 생활 공간을 담는다. 그는 수평적인 선을 중심으로 공간의 위와 아래, 혹은 안과 밖의 모습을 담는다. 그의 사진에는 거대한 피사체나 큰 의미를 담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바닥에 떨어진 담배, 죽어있는 새, 혹은 날리는 깃털과 먼지를 담고, 얼룩이 진 벽과 흔들리는 창문을 배경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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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진만으로는 그가 사진을 찍는 곳이 탄광촌인지, 혹은 사람들이 떠난 곳인지, 더 나아가 이 곳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추측하기 힘들다. 그는 그 공간을 전달하기 위해 공간을 규정하는 특정 사물이나 구조를 애써 찾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 공간의 세밀하고 작은 부분들을 찾고, 그 공간에서 사라져가는 아주 작은 것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소박하게 담긴 대상들은 전체의 분위기와 공간에 담긴 빛의 형태를 보여준다. 하나의 피사체를 통해 규정된 공간이 불쑥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작고 어둡고 스러져가는 것들이 공간의 빛깔을 조심스럽게 전달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쓸쓸한 빛깔을 느끼는 동시에 이 곳에 가진 추억을 떠올린다. 이 장소에 깃들어져 있는 이 쓸쓸함은 이 곳을 원래 채우고 있던 사람들의 부재로 인해 생긴것이며, 이 쓸쓸함을 공간과 함께 느낀다는 것은 이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원래 죽은 참새가 누워있지 않고 살아있는 새들이 지저귀며 날라다니는 곳은 아니었을까? 혹은 떨어진 낙엽 대신에 열심히 일한 광부들의 땀방울이 흩어져있지는 않았을까? 작가는 이 공간과 공간을 에워싼 바깥을 조금씩 보여주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를 통해 전체를 상상하고, 만들고, 결국엔 느끼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그의 말처럼 남겨진 공간을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며 완성시키는 것이다.



페터 필러(Peter P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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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evanread.net/b2.htm)


'나는 작품에 대한 연구가 이해에 도움을 줄 때,
그리고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소통할 때
예술적 표현에 흥미를 느낀다.'


페터 필러는 지역 신문에서 그가 아카이빙한 여러 사진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키워드로 묶이는 시리즈를 구성한다. 텍스트와 함께 배치되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보도 사진들의 특성을 배제하고, 이미지들의 묶음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에는 감상자들이 없는 텍스트의 빈 공간을 채우게 된다. 혹은, 사진에 담긴 이미지 만으로도 의미가 직관적으로 완성된다고 여기면, 텍스트는 필요없어질 수도 있다.

또한, 빈 공간을 채우든 가만히 놔두든, 사진을 해석하는 방향은 결국 개인의 경험과 상황에 따라 상이하다. 1997년 1월 3일자 신문에서 a라는 특정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실린 이미지가 나에게는 a와는 상반되는 의미인 b를 떠올리게 할 수도 있고, 나 옆의 다른 감상자는 c를 떠올릴 수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이미지를 던지고, 던져진 이미지는 서로 소통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와서 해석된다.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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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의 세 개의 시리즈 중 '사격하는 소녀'는 총을 들고 있는 소녀들이 총을 들고 사격한는 모습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찍은 10~15장의 사진들로 구성된다. 이 소녀들이 모두 '사격하는 소녀'들이라는 데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총을 든 이유는 무엇인가? 총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사격장의 목표물을 향하는 것이 확실한가? 만약 총구가 사람을 향하는 그 순간을 사진가가 포착해서 찍은 것이라면?

 이 소녀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사격 선수인가, 사격을 취미로 하는 학생인가, 혹은 한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연쇄살인범의 어릴 적 모습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에 따라 사진 속 소녀들의 웃거나 무표정한 모습들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훗날 살인을 용이하게 하는 기술을 익히며 띄운 회심의 미소인가, 혹은 사격을 취미로 가지게 되어 기뻐하는 것인가, 아니면 억지로 총을 들고 포즈를 잡으며 지은 가식적인 웃음인가. 아마 이 이미지들이 처음 실린 신문들에서는 이 질문들에 대한 간략한 답이 이미지 옆 텍스트로 나와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무성의하게 이미지들만 던져주고, 나머지를 우리에게 맡긴다. 그리고 덕분에 우리는 이 이미지들의 소녀들이 서로 어떻게 다르고 비슷한지, 그리고 사진 속 이들은 어떤 의미를 지닐지 재구성하며 질문들을 던진다. 아무도 답해주지 않을 질문들을 던지는 유희 속에서 우리는 해석의 자유를 경험한다.


[양유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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