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앙리-카르티에 브레송 展 10주기 대규모 회고전 (영원한 풍경)

글 입력 2015.02.14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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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의 문턱을 넘는 일이 요즘 참 어렵다. 이어진 일상을 습관처럼 부득부득 전진시켜가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뭐랄까, 누군가 달려가던 나를 불러 멈춰 세운 느낌이라고 하면 좋을까.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춰 세우고 뒤돌아서면 거기 예기치 못하게 내가 인지하지는 못했으나 분명 나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풍경과 번쩍 마주 서는 그런 느낌. 나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그 풍경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 화분이 놓여있었나, 개가 있었구나, 지각하지 못했던 풍경들이 갑작스레 이름표를 달고 여기저기서 손을 흔드는. 그리고 나는 그 풍경에 놀라는 동시에 거기에 이것이 있었다는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전진하고 있었다는 찬 상기에 다시 놀라고 마는 일이다. 어떤 전시를 본다는 일이. 이런저런 얕은 생각을 접으면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展 영원한 풍경>의 티켓을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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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아가며 이미지에 무뎌지는 우리를 생각한다. 여기에는 시시각각 생산되어 소비되고 이내 새로 등장한 이미지에 밀려 저편으로 완전히 구겨져 사라지고 마는 무수한 이미지가 있다. 이들은 우리를 겹겹이 둘러싼 채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목을 끌기 위해 확성기의 볼륨을 한껏 올린 채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른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쪽을 자극하지 못하면 그것은 쉽게 밀려나고 사라지기 마련이라, 악다구니는 멈추지를 않는다. 반복된 자극에 우리는 금세 둔감해지고, 이 앞에는 이제 더 큰 자극만이 자리할 수 있을 뿐이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폭력과 잔혹함을 보여 주는 이미지로 뒤덮인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라 지적한 바 있듯.


스펙터클한 이미지의 과포화 상태 속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렇다면 브레송의 흑백사진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걸까. 우리가 마주하는 이미지 속에는 이미 수많은 선택적 개입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 카메라 뒤편에 선 누군가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실상 어떤 사진도 현상 그 자체를 순진하게 보여줄 수는 없다. 이는 곧 ‘선택적’ 사진이 현상을 조작하는 힘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브레송은 이렇게 말한다. "사진을 찍을 때 한쪽 눈을 감는 것은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다.” 이 눈의 시선은 피사체의 내면을 향한다. “나는 사람들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고 그들을 알고 싶다.” 그들을 알고자 하는 일에서, 셔터를 누르는 자의 말이 사라진다. 이 자리에 피사체들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브레송은 그들이 충분히 목소리를 내는 그 순간을, 셔터를 누를 순간을 몇 시간이고 기다렸음을 스스럼없이 밝힌다. “나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면서 무엇이든 와락 덤벼들어 움켜잡을 태세를 취한 채 거리를 쏘다니며 삶의 현장을 올가미로 잡아 보전할 결심을 했다. 무엇보다 나의 목전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의 본질을 단 한 장의 사진으로 포착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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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에서 한 소녀가 빛의 사각으로 뛰어들어가는 순간을 포착한 그의 사진이 오래 남는 것은 운동감과 조형감이 맞물리는 순간, 그것이야말로 찰나의 순간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던 까닭이다. 풍경이 내포한 색채에 기대지 않으면서 구도와 빛 그리고 음영이 주는 농담에 완전히 빠지고 말았다. 도색되지 않은 브레송의 구도들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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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가기 전, 내심 기대하던 사진이 있었다. 체 게바라와 앙리 마티스, 수전 손택, 테드 휴즈, 피카소, 카뮈 등 나를 마음껏 부수고 세웠던 텍스트들과 그림 조형들을 쏟아내었던 이들 앞에 선다는 일은 내게 커다란 의미였다. 이들이 대지에 발을 붙이고 살아 숨 쉬며 존재했던 순간과 마주한다는 자체가 내게는 큰 설렘이었다. 그랬다. 그들의 순간은 브레송의 손끝에서 영원히 영속하는 순간으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피사체로서 억지로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불쑥 부드럽고 뜨거운 내면을 들어낸 채 자리하고 있었다. 브레송은 그 내면의 순간을 오래도록 기다리고 비로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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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과 마주한 일보다, 이국의 어느 이름 모를 이들이 찍혀있는 사진과 마주한 일이 더 값지게 여겨졌던 것은, 우리 개개인이 그 누구도 평범하지 않다는 믿음에 있었다. 우리가 한 식탁에 둘러앉아 한 끼 식사를 같이한다는 것, 그저 우리가 이 대지에 함께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우리가 모두 값지고 소중한 사람들인지. 그가 남긴 한 마디가 유독 마음속에 묵직하게 자리하는 이유이다. “난 평생 결정적인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길 바랐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우리의 삶에서 자리하는 그 어떤 사사로운 일상도 실은 사사롭지 않은 ‘결정적 순간’이라는, 어쩌면 너무나도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따스한 말이 남으며 새로 산 신발이 유난히 나의 걸음을 붙잡았음에도 참 즐거운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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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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