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벽면에 거꾸로 매달린 거대한 인물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독수리와 나무, 사람의 손과 발까지 시선이 닿는 모든 대상이 우리의 일상적 감각을 비켜나 있다.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의 화폭 앞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은 하나다.
왜 모든 것을 거꾸로 그렸을까?
세화미술관에서 개최된 이번 회고전은 1960년대 초기작부터 '영웅' 연작과 '엘케'의 초상, '리믹스' 시리즈, 그리고 말년의 '골드 페인팅'과 조각에 이르기까지 60여 년에 걸친 바젤리츠의 대표작을 다채롭게 조명한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거장의 생애와 조형적 궤적을 깊이 있게 담아낸 그 현장을 찾아가 보았다.
무너진 시대에 태어난 화가, 영웅을 뒤집다
바젤리츠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거쳐 온 시대적 배경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38년 독일 도이치바젤리츠에서 한스게오르크 케른(Hans-Georg Ker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를 경험했다.
이미 '질서'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파괴를 목격한 그에게 기존 회화의 전통과 형식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은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1960년대 '영웅(Heroes)' 연작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반적인 영웅상이 지닌 승리자의 당당함 대신, 그의 화면 속 영웅은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황폐한 풍경 속에 지쳐 서 있는 불안정한 존재로 그려진다. 독일의 국가적 상징인 독수리 역시 비상이 아닌 추락을 하듯 거꾸로 세워진다. 이때부터 그는 세상에 존재하던 위계를 끊임없이 해체해 나간다.
전도(轉倒) 회화: 형상을 넘어 회화 자체로
1969년은 바젤리츠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거꾸로 된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흥미로운 점은 그가 완성된 그림을 단순히 거꾸로 매달아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젤리츠는 처음부터 뒤집힌 형상을 그렸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표정부터 읽는다. 풍경을 보면 그것이 어느 장소인지 생각하고, 독수리를 보면 독수리라는 대상을 먼저 인식한다. 그림을 보기 전에 그림 속 ‘무엇’을 알아보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이 거꾸로 돌아가는 순간 이 익숙한 인식 과정에 오류가 생긴다.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물감이 흘러내린 흔적과 거친 붓질, 즉 색과 형태가 먼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전도’는 실제로 바젤리츠에게 구상과 추상의 문제를 돌파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동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도, 당시 서구 미술계를 지배하던 추상에도 온전히 속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자신만의 회화적 언어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형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형상이 그림의 모든 의미를 지배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뒤집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오래 보고 있으면 ‘거꾸로’라는 사실이 오히려 덜 중요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처음에는 ‘거꾸로 된 사람’이 보였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색이 보이고, 선이 보이고, 물감의 질감과 움직임이 보인다. 그림을 뒤집음으로써 오히려 그림 자체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 바젤리츠의 전도된 세계가 가진 가장 흥미로운 역설이다.
말년의 거장이 도달한 곳,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이번 전시에서 가장 강렬한 잔상을 남기는 구간은 단연 말년의 '골드 페인팅' 연작이 전시된 공간이다. 전통적으로 이성과 정신을 대변하는 얼굴과 머리가 인간의 가치를 상징해 왔다면, 손과 발은 그 뜻을 수행하는 하위 도구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바젤리츠의 화면에서 손과 발은 비대해진 채 당당히 주인공으로 들어선다. 평생 무언가를 만들고, 버티고, 걸어온 인간에게 정말 중요한 신체는 이성이라는 관념뿐이었을까.
누군가의 손을 자세히 바라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보일 때가 있다. 굳은살과 주름, 닳은 손톱처럼 말보다 먼저 삶을 증언하는 흔적이 있다. 발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아래에 존재하기 때문에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지만 평생 한 사람의 무게를 견디는 곳이다. 바젤리츠가 말년에 몰두했던 ‘골드 페인팅’까지 이어지는 전시의 흐름 속에서 이 신체들은 더 이상 인간의 부속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세상의 위계를 끊임없이 뒤집어 온 거장이 생의 마지막 순간 다정한 시선으로 들여다본 곳은, 결국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한 인간을 묵묵히 지탱해 온 손과 발이었다.
가끔은 세상을 뒤집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것을 당연하다고 믿는다. 강한 사람은 위에, 약한 사람은 아래에 있다는 생각. 머리와 가슴에 비해 손과 발은 숭고하지 않다는 생각. 오래 믿어온 가치일수록 그것이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하지만 바젤리츠의 그림 앞에서는 그 익숙한 세계가 잠시 뒤집힌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세상을 거꾸로 놓은 다음에야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게 된 것이 있다면, 가끔은 그것을 완전히 뒤집어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달라지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그제야 비로소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한 우리의 시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