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딧은 모두 올라갔고 심벌즈 위로 떨어진 핏방울의 열기는 아직 식지 않았다. 나는 검은 화면 속에서도 여전히 드럼을 치고 있는 앤드류를 본다. 드럼은 멈추지 않는다. 드럼의 박자에 맞추어 공중으로 튀어오르는 방울들은 전부 그의 피와 땀이다. 드럼을 통해 한 사람의 열정과 야망 그리고 학대의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영화, 2015년에 개봉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위플래쉬’다.
영화의 장르는 드라마, 음악, 성장, 그리고 스릴러다. 스릴러는 독자나 관객에게 공포와 긴장감을 심어주는 장르인데 유령 하나 나오지 않는 음악, 성장영화에서 어떻게 공포감을 줄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플레쳐의 등장과 함께 설명될 수 있다. 플레쳐는 셰이퍼 음악학교의 교수로, 주인공인 앤드류를 자신의 밴드에 합류시키는 핵심적인 인물이다. 앤드류의 근원적인 문제들의 시발점이기도 한 그가 추구하는 교육방식은 이 영화에서의 논의 지점이 된다. 플레쳐는 밴드에 처음 합류하게 된 앤드류의 뺨을 때리고 의자를 던지고 입에 담기조차 힘든 온갖 욕을 하며 윽박을 지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앤드류의 박자가 잘못됐다는 이유에서다.
1. 플레쳐의 처음이자 마지막 미소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들이 휘몰아치고 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플레쳐를 무조건적인 악인으로 평가할 것이다. 반면 결말에서 앤드류가 이루어낸 완벽한 음악을 통해 그의 교육방식이 나쁘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는 입장도 존재할 것이다. 우선 나의 입장은 플레쳐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점을 밝힌다. 그가 추구하는 교육방식은 잘못되었다. 학교에서 문제를 삼고 이에 대한 조사가 시행되어 그가 학교에서 퇴출되게 된 것만으로 이 논의는 증명될 수 있다.
플레쳐는 앤드류가 신들린 듯 드럼을 연주하는 마지막 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소를 보인다. 이것은 한치의 오차도 허락할 수 없는 그의 음악적 사고가 허락된 유일한 순간, 즉 앤드류가 그에게 음악적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나는 이 장면에서 플레쳐는 음악을 연주하는 학생들과 연주자들을 철저히 연주하는 기계로서 대한다는 의견을 말하고 싶다. 그는 음악의 뒤에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시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플레쳐는 자신이 학교에서 잘리게 된 이유가 앤드류의 고발이라고 생각해 그를 골탕먹이려는 와중에도 심벌즈가 흘러내리자 고쳐세워준다. 오직 완벽한 음악, 완벽한 드러머를 완성하기 위해서다. 그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목표는 앤드류와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듯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한계 앞에 학생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비로소 완벽한 연주가로서 삶을 펼칠 수 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션’을 통해 한계를 넘어선 자의 무너져내림을 보여준다. 여기서 내가 제기하고 싶은 또 한 가지의 문제점은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플레쳐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기도 하는 이 장면은 결국 그도 음악가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으나 션의 죽음을 사고사로 거짓말한 점에서 이 눈물은 진실되지만 묘한 어긋남을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그의 눈물은 자신이 아끼는 제자의 죽음에 대한 애도라기보다 완벽하게 키워낸 음악가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에 더 기우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의 거짓말은 자신의 지나간 교육에 대한 반성을 찾아볼 수 없으며 어쩌면 그 자신도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앤드류를 다그치고 욕하고 몰아세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스승이 어떻게 계속해서 가르침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아이들은 계속 변하고, 성장을 해야하는데 이를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스승 아닌가.
결국 이들이 하는 것은 음악이다. 모두에게 같은 악보가 주어지지만 언제나 똑같이 일정한 연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이들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만이 낼 수 있는 표현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연주에 대해 설명하면서 피아노를 치는 짧은 영상을 본 적 있다. 음악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은 작은 스마트폰 기기에 불과했지만 그가 그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 그 공간을 느끼며 서서히 음악이 오듯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굉장한 차이를 느끼게 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술의 의미, 음악의 의의를 다시금 살펴보게 된다. 비록 내가 음악에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지만 숫자를 계산해서 답을 도출하듯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도록 훈련되는 것이 음악인가?에 대한 의문은 들어볼 법하다는 생각이다. 앤드류는 언젠가 플레쳐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음악가로서 살아가게 될 텐데 과연 그때 음악적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틀에 박혀 정해진 글을 써내야만 했던 고등학생을 지나 큰 혼란과 방황을 했던 스무 살의 내 경험을 비추어 보면서 플레쳐의 인정만이 과연 음악적 성공을 이루어낸 것이라고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악기 앞에서 이들은 결국 ‘겁에 질린’ 음악만을 연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2. 앤드류에게서 자기착취의 흔적 찾기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앤드류의 변화에 대해 초점을 맞춰 바라볼 필요가 있다. 드럼을 연주하다가 플레쳐 교수의 눈에 띄어 그의 밴드에 들어가게 되고 우연한 계기로 앤드류는 보조에서 메인 드러머가 된다. 친척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우월감에 빠진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가 연주자가 바뀌면서 자신 역시 밀리게 되는 좌절도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더 완벽한 연주, 즉 메인 드러머 자리를 되찾기 위해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피 흘리는 손을 얼음물에 집어넣는 등 미친듯한 노력과 열정을 쏟아 붓는다. 이러한 그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잔인하고 소름돋는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그가 드럼을 연주하는 모습이 마냥 꿈을 쫓는 열정적인 사람으로 비춰지기 보다는 제정신의 경계를 넘어선 공포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특히 교통사고가 난 뒤 피를 흘리면서도 공연장으로 뛰어가는 장면에서는 극한에 치달은 인간의 모습을 더없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다시금 플레쳐의 교육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선 나라는 사람이 칭찬을 할수록 더 노력하고 몰아세울수록 더 시드는 유형의 관점에서 플레쳐의 태도가 더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따라서 전술된 플레쳐의 문제점에서 추가로 정리해보자면 첫 번째, 비난이 음악만을 향하고 있지 않다.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세우기 위해 물건을 던지고 부수며 개인적인 가정, 외형, 성격을 비난한다. 따라서 초반에 음정이 틀렸다며 나가라고 한 연주자를 보며 그는 자신의 음정이 틀렸는지 아닌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용기가 부족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지나치게 사람을 몰아세우다보면 안정에 집착하게 된다. 집이 그립다고 말하는 영화관 소녀 니콜과 정신적 안정감을 주는 아버지와 영화를 보는 앤드류, 나의 경우에도 외부적으로 강한 압박이나 스트레스를 얻게 되면 조용한 집 내부에서 안정감을 찾고 때로는 이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생긴다. 밖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크다 보니 안정감을 채우기 위해 지나치게 의존적으로 행동하게 되거나 외부적인 활동과 교류를 최대한 제거하려 하는 습관이 생기는 것이다.
세 번째가 바로 자기착취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일종의 강박으로도 볼 수 있는 자기착취는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나의 문제기도 하다는 점에서 수업에서 가장 깨달음과 충격을 받았다. 수업에서 자료로 사용된 김누리 교수의 글에 의하면 외부에서 비롯된 착취는 내 안에서 반발심이 일지만 내 안에서 시작된 착취는 자신 스스로를 공격하며, 휴식을 취할 때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감독관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영화 내에서 손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연습을 멈추지 못하고, 영화의 후반부에서 플레쳐에게 분노해 달려드는 앤드류의 모습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자기착취의 문제점은 내가 스스로를 착취한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자신을 더 극한으로 몰아세운다는 점이다.
더 완벽하고 더 뛰어난 실력을 갖게 되더라도 지나치게 자신을 내몰아서 안 되는 이유는 ‘션’이라는 이름 한 글자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자신을 더 벼랑 끝으로 내모는 마음 역시 어느 정도 필요하겠지만 그 밧줄 끝에 늘 매달려있다가는 발을 헛디뎌 추락할 날도 오기 마련이다. 플레쳐는 세상에서 가장 쓸데 없는 말이 ‘그만하면 됐어.’라고 했다. 줄어드는 반창고, 여러 겹 덧대어 붙인 반창고 위로 다시 또 피가 줄줄 새어나오고 그 손을 얼음물 속에 집어넣는 새벽을 사는 사람들에게 나는 제발 그만하면 됐다고 말하고 싶다.
아픔을 주었던 사건 사고는 트라우마를 낳는다. 비록 영화 내에서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폭력은 한 번 경험한 이상 평생 한 사람의 순간을 제지하고 얽매여 숨통을 조인다. 그렇게 온갖 모독과 고통을 겪은 이후에도 다시 플레쳐 교수의 제안에 응해 무대에 서게 된 앤드류에게는 한 가지 확실한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드럼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정말 미치도록 잘하고 싶은 것. 앞머리가 다 젖도록 손이 피범벅이 되도록 드럼이 좋은 것. 이 영화에서 플레쳐의 위험한 교육방식뿐만 아니라 더불어 앤드류의 드럼 역시 눈에 띄게 바라볼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앤드류의 드럼 소리에서 우리는 그의 손에 새겨진 무수한 상처들과 그가 드럼을 대하는 마음을 동시에 들을 수 있다. 나는 앞으로 앤드류가 드럼 앞에서 더 편해지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