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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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 벌어지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편을 정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모노노케 히메〉(1997)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숲을 불태우는 인간과 분노하는 신들,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려 했다. 그런데 영화는 내가 들이민 잣대를 번번이 뒤엎었다.

 

타타라 마을의 지도자 에보시는 숲을 파괴하지만 공동체로부터 버려진 이들에게 역할과 존엄을 쥐어줬다. 옷코토누시는 인간을 공격하지만 그것은 동족의 죽음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됐다. 모로는 증오하는 인간의 아이를 딸로 거두고 끝까지 사랑한다. 편을 정하려 할수록 어느 쪽도 완전히 나쁘거나 완전히 옳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처음부터 "누가 잘못했는가"가 아니라 "어쩌다 이렇게 됐는가"를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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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주의 깊게 본 것은 '말 할 수 있는' 동물 신이다. 늑대 신 모로는 인간의 언어로 분노하고 애정을 표현한다. 멧돼지 신 옷코토누시는 복수를 맹세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숲에 나무를 심어왔던 타버린 몸체와 새빨간 눈을 가진 성성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무 심었다. 나무 심고 나무 심었다. 모두 인간이 뽑는다. 숲은 돌아오지 않는다...."

본래 원숭이의 모습을 가졌던 선한 존재가 마을의 무분별한 발전에 질려 분노한다.

 

오랫동안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경계는 언어와 이성이었다. 말할 수 있는 존재만이 인간으로 인정받았고, 말하지 못하는 것들은 배경이 되거나 자원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모든 대상은 말한다. 감정을 갖고, 의지를 갖고, 자신의 입장을 주장한다. 작 중 등장하는 신(가미)들은 모두 원한을 품은 원령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며, 이를 인간은 두려워한다. 미야자키는 비인간 존재들에게 설정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동등한 주체로 내세운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 신(비인간)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가?

 

말했듯,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을 이성을 가진 특별한 존재로, 자연과 동물을 그보다 아래에 있는 대상으로 여겨왔다. 하야오적 사고는 그 위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등장하는 모든 존재가 인간과 적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가 숲의 신 시시가미이다. 시시가미는 생명을 주기도, 거두기도 하는 어쩌면 인간과 동물 사이의 중립적인 존재이다. 그는 어떤 편도 들지 않은 채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대립하는 대상 사이를 응시한다. 그리고 그 헤아림 속에 두 존재만이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밟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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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늑대에게 길러졌고, 인간을 증오하지만 인간의 몸을 갖고 있다. 모로는 아시타카에게 말한다.

 

"산은 인간도 될 수 없고, 들개도 될 수 없는 가엾고 사랑스러운 내 딸이다."

처음엔 이것이 산의 비극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다르게 읽힌다. 산은 두 대상의 언어를 모두 알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동등한 대상 사이 교집합처럼,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어진 선 위에 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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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저주를 짊어진 주인공 아시타카 또한 경계 앞에 함께 서 있다.

 

에보시에게 그는 말한다.

 

"흐림 없는 눈으로 모든 것을 보겠습니다."

 

일본어 원문에서 '흐림 없는 눈'은 마코토(まこと), 타자를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하겠다는 의지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선언이 어느 한쪽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시타카는 자연의 편에서 인간을 바라보지 않는다. 동시에 인간의 편에서 자연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어느 쪽도 위에 두지 않은 자리에서 둘을 똑같이 응시하려 한다. 그 태도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산을 구하러 간 그는 에보시도 구한다. 들개 편에 서면서도 인간을 이해하려 하고, 결국 시시가미에게 머리를 돌려줌으로써 자연과 인간 모두를 죽음에서 건져낸다. 어느 한쪽을 선택했다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이것을 '응답 가능성(response-ability)'이라고 부른다.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기 전에 먼저 상대의 고통 앞에 서는 것. 아시타카는 인간과 자연 양쪽의 고통에 동등하게 응답한다.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올곧은 눈으로 응시하는 것. 나는 이 태도가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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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의외로 조용하다. 모든 존재가 물 속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나는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철을 만들고 자연을 태우는 불(=인간 문명)이, 신성한 생명력의 물(=자연) 안으로 시시가미의 머리를 조정의 하수인들에게 빼앗기고 나타난 재앙 속에서, 에보시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 들개, 산, 아시타카 모두가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서로 지배하려 했던 욕망을 내려놓고 동등한 본질로의 회귀를 의미했다.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서 내려와 지구 위의 모든 존재들과 같은 위치에 놓이는 것. 물속에서 인간과 동물, 자연과 문명의 위계는 잠시 사라진다. 인간이 모든 것의 위에 있다는 전제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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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산과 아시타카의 대화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아시타카는 좋아해. 하지만 인간은 용서할 수 없어."

 

"그래도 좋아. 나와 함께 살아가자."

 

용서가 전제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이해가 완성되지 않아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숲은 재생되지만 완전히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산과 아시타카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며 영화는 끝난다. 깔끔한 화해도, 비극적인 파멸도 아니다.

 

〈모노노케 히메〉가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도 재해석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남겨둔 채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묻는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자연과 인간만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과 동물, 생명체와 사물 사이에 수많은 경계를 그어 왔다. 그리고 그 경계 위에서 어떤 존재는 중심이 되고, 어떤 존재는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모노노케 히메>가 흔드는 것은 그러한 경계를 당연하게 여겨 온 우리의 태도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갈등 앞에서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 먼저 묻는다. 그러나 <모노노케 히메>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 것은 바로 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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