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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은 연보라가 곳곳에서 일겠습니다 - 2026 서울시향 조너선 노트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3번

기다림에도 색이 있다면, 소리가 몸을 얻는답니다

by 장유진 에디터
2026.06.11 14:06



    

 

서울시향의 6월 정기공연을 예습한다는 마음으로 리게티의 '론타노'를 재생했다. 처음엔 내가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유리 파이프를 통과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때부터 상상하기 시작했다. 6월 18일과 19일, 그날의 소리에는 무슨 색이 자라나 있을까. 내가 아는 서울시향의 색이라면, 오묘한 연하늘과 보랏빛이 섞인 바로 그 색이겠지. 정말로 그 색을 보여줄까.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미 이곳에 먼저 머물고 있었던 걸까. 귓청이 내 머리 위로 떠오른다. 하늘과 가까운 방향으로, 꼿꼿하게 일직선으로 떠오른다.

 

기묘한 꿀렁거림이 나타날 것이다. 어디선가 얄따란 금색 실이 한 가닥으로 시작해 여러 갈래로 모습을 달리하겠다. 어두운 쪽의 이야기다. 마치 삼도천으로 향하는 배 위에 홀로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신비롭고 위험하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위태롭다. 공연장과 사람 위를 떠돌며 유령이 되었다가 안개가 되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떠나간 자의 집념인가. 살아 있는 자의 불안감일까. 어느새 잠든 쪽에 머무는 때면 새로운 각도의 이야기가 시작되겠다.


잠시 숨을 색색 고르려는지 형체를 많이 감추는 때가 있겠다. 그렇다고 안정되었나? 글쎄, 말벌 떼가 소리소문없이 아래로 닥칠 것이다. 첫 시작의 그 무언가가 내 무릎 근처에 주저앉아 있기도 하겠다.


계속 이쪽으로 다가오는데, 무언가를 끼얹어 놓으려 갖은 애를 쓰는데, 경계선 안으로 들이닥치지는 못한다. 절대 깨질 수 없는 보호막 같기도 하다. 애초에 다른 세계인가. 깰 수 없는 장벽일까. 무엇이 그리도 두렵길래 우리는 서로를 외면하는 걸까. 곡이 끝나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이 시작되었다.

 

 

 

 

1악장, 내가 라흐마니노프를 쓴다니? 그를 필사한다니. 이것만으로도 기분이 생경하다. 그냥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고 사건에는 발화점이 존재한다. 어디서 왔는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이미 무슨 일은 매번 시작되고 있다. 그 지점을 상기하면서 피아니스트가 흘리는 라벤더색 유리구슬을 따라가기도, 놓치기도 해보자.


잠깐의 안심 구역을 지나가다 보면 멀지 않은 곳에 버튼 하나가 놓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 앞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역할을 달리하는데, 그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연주가는 관객을 완전히 지나쳐 강하게 피아노를 두드릴 것이다. 관객은 버튼이 눌림에 따라 완전히 사고를 정지한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내 이야기 하나 꺼내 보일 틈도 없는 몰입의 세계에서, 나는 생각하기를 멈춘다. 지금 이 순간,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그저 피아노, 그저 라흐마니노프, 그저 소리, 숨결. 이것을 듣고 있는 내 귀에 집중하고, 텅 비어 있는 마음 한구석을 지긋이 관찰해보자. 


폭풍 한가운데서라도 쉬어갈 줄 알아야 한다. 복잡한 일은 저 무대 위에 다 맡겨버려야 한다. 그들이 무사히 건너낸다면 우리는 그들이 잘해내고 있는지 궁금해할 줄도 모르고 멈춰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저 기대하고 있다. 소리가 보라색이었으면. 정적이 많았으면. 별이, 나무에서 자라난 별이 천장에 많이 띄워져 있기를.


2악장, 관악기가 오묘한 분위기를 만들어줄 동안, 현악기가 나머지 길을 이어줄 동안, 이 10분 정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잘 보낼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안겨 있을까. 앉아 있을까. 웃고 있을까. 울상 지어볼까. 그냥, 기다리다 보면 피아노가 옅은 안개 사이에서 노래할 것이다.


왼손을 기다릴까. 오른손과 나아갈까. 무엇을 해볼까. 가만, 귀를 기울여보자. 무엇을 뒤따르면 좋을지는 그날의 피아니스트만이 일러줄 수 있는 재미난 지점이다. 과연 우리는 이 악장의 끝자락에서 음악만이 줄 수 있는 무한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까. 끝이 다가오는 게 일찍이 아쉬워졌으면 참 좋겠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왼손이 많이 시렸으면 좋겠다.


3악장, 신호탄이 울리며 3악장이 시작된다. 이 악장에서 우리는 지난 1, 2악장을 어떻게 보내왔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풍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누구는 러닝을 하고 있을 것이고, 누구는 꽃다발을 흔들고 있을 것이며, 누구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공기 중을 마구 휘저으며 재미난 춤을 추고 있을 수도, 좌석 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때의 나는 어떨까. 이상하게 멀찍이 놓인 ‘나’는 그리 기대가 안 되는데, 눈앞에 놓인 ‘나’는 꽤 궁금하다. 수요일쯤에 금요일 저녁을 기다리는 셈 아니겠나? 즐거운 일이다. 어디선가부터 밝은 조명이 이쪽으로 다가온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스멀스멀 동이 트려나 보다. 

 

노을이려나? 이 또한 당신만이 볼 수 있고, 또 알 수 있는 재미난 풍경 중 하나겠다. 어떤 결말이려나. 어떤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출입문이려나. 만개한 미소가 가득하려나. 아쉬움 가득한 이별이려나. 곡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3번 ‘폴란드’로 이어졌다.

 

 

 

 

1악장, 감각을 일깨우는 게 아니라 감각을 두드린다. 기어코 운동시키고 만다. 이런 곡일수록 무용수들과, 또 군무와 함께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1악장만 듣고 가도 엄청 만족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적인 하나 됨보다, 그냥 출연진이 애초에 많다. 즐길 거리가 상당하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것을 택해볼 기회도 많고, 기다림의 시간도 꽤 적당하다. 특히나 중후반의 세련된 흥겨움을 엿보는 재미를 어찌 놓칠까.


2악장, 솔직히 이건 발레와 함께 들어야 한다. 대사 한 줄 없이 이곳과 저곳으로 발을 옮겨가는 배우와, 눈빛과 미간으로 노래해줄 누군가의 표정이 필요하다. 한 명이 독무를 추고 있으면 그 근처를 동물들이 맴도는 장면도 좋을 것 같고, 주인공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곁을 지켜보는 것도 좋겠다.


무슨 장면을 그리는 때일까.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슬며시 엿보여주는 것은 어떤가. 사리 밝고 재간스러운, 미소 짓기를 즐기는 청년의 움직임을 상상해보자. 만남도 없고 이별도 없는 마음 편한 세상이다. 숨죽인 채 고개를 빼꼼 이쪽으로 내미는 순간까지.


3악장, 악장에 달린 예고편을 읽지 않고 오로지 소리로 첫인사를 할 적에, 이때쯤이면 음악이 과도하게 커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잠시 가라앉으니 안심이 되었다. 뭔가를 보여줘야만 하는구나. 해야 할 일이 엄청 쌓여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그 상황이 되어봐야만 알 수 있는 게 있고, 무섭다, 무조건 잡아먹힌다고 생각했던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기도 했다.


잠시 힘을 빼고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동안,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겠다. 변한 게 없다고 어찌 속단할 수 있을까? 행했다는 것, 그리하였다는 것 자체가 모든 다음 챕터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다 반짝반짝하다. 이 악장에서 힌트를 참 많이도 준다.

 

4악장, 그래도 닻을 올리긴 해야겠지? 낮잠의 시간에서 빠져나와 저녁의 시간을 즐겨야지. 곳곳에 어깨를 가볍게 만드는 난쟁이들의 비장함이 장난감 세트장 위에 가득하다. 손 안에 뭔가를 하나씩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들은 어디로 떠나려 하는 걸까? 여정일까, 탐험일까, 운명과 맞선 모험의 시작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걸까! 소근소근. 궁금하고 또 궁금하다. 시소를 타면서 기다려보자.


5악장, 그래. 팡파레는 터뜨려야지!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점프도 해야지. 여유로운 웃음과 기품은 잠시 뒤로하고 우리 함께 감각을 노래하자. 우리는 파란 풍경을 눈에 담아 까만 카메라로 서로의 오늘을 기억하고 다음을 기약하자. 또 만나. 즐거웠어. 안녕.


공연이 시작되면, 이 기다림의 색을 알 수 있을까? 소리가 몸을 얻고, 안개가 피아노가 되고, 피아노가 다시 팡파레가 되는 순간을 우리는 마주하게 될까. 우리는 서로의 자리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자. 혹시 내가 잠든 쪽에 잠시 머물러 있다면, 연보라가 도착하는 순간 조용히 깨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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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교향악단은 오는 6월 1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2026년 시즌 정기공연 〈조너선 노트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3번〉을 선보인다. 이번 공연은 영국 출신 지휘자 조너선 노트가 지휘하고, 피아니스트 프란체스코 피에몬테시가 협연자로 나선다. 프로그램은 리게티의 '론타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3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3번 ‘폴란드’로 구성된다.

 

 

[프로그램]


리게티, 론타노

Ligeti, Lontano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3번

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 3 in D minor, Op. 30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3번 ‘폴란드’

Tchaikovsky, Symphony No. 3 in D major, Op. 29, 'Po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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