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한다. 수집 또한 좋아한다. 그렇기에 내가 본 영화들을 차곡 차곡 컬렉션에 수집할 수 있는 영화 어플 ‘왓챠’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약 10년 전 수능이 끝나고 첫 노트북을 샀을 무렵, 사촌오빠에게 이런 어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왓챠는 늘 내 핸드폰에 깔려 있었다. 이제는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어플 이름 또한 왓챠피디아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나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 해당 어플에서 별점을 매겨 나의 관람 목록을 업데이트 한다. 목록 외에는 내 손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왜인지 나는 이 리스트를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수 년간 천천히 모아온 쥬얼리나 와인을 보는 것처럼 괜시리 뿌듯한 마음이 든다.
소중한 빈티지 컬렉션을 들여다보듯, 여느 때처럼 왓챠의 평가 목록을 스크롤 중이었다. 그러다 멈칫, 손가락이 멈추었다. 한 영화가 눈에 걸린다. 이 영화를 본 기억은 있는데, 내용이 뭐였더라? 해당 영화의 줄거리를 슬쩍 읽어본다. 파편처럼 장면 장면이 떠오른다. 그래, 이런 영화가 있었지…… 다시 리스트로 돌아가서 스크롤을 시작했다. 그러다 또 다시 멈칫, 내가 이런 영화를 본 적이 있었던가? 해당 영화 정보를 터치해본다. 이런 줄거리에 이런 포스터와 장면들, 아무리 봐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해당 영화를 본 것은 같은데, 줄거리를 읽어도 도저히 그 내용이 떠오르질 않았다. 황급히 내 영화 리스트를 아래까지 쭉 내려보았다. 대부분의 경우 그 영화를 본 기억과 내용이 파편처럼이라도 기억이 났다. 그러나 몇몇 영화의 경우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어떠한 정보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내가 언제, 어떻게 그 영화를 봤는지 그리고 영화의 내용까지 말이다
분명히 그 영화를 보고 나의 감상을 정리해 별점까지 매겼을 텐데 기억 속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영화를 내가 본 적이 있다고 해도 되는 걸까? 갑자기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떠한 콘텐츠를 소비할 때면 늘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는 고민거리가 있었다. 바로 망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사실 영화보다도 이런 두려움이 가장 큰 분야는 바로 책이었다. 정보를 얻기 위한 독서여도 단순 재미를 위한 소설 독서여도 마찬가지였다. 읽고 뒤돌아서면 내용이 흐릿해지는게 참 싫었다. 이러면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 말하는 것이 반칙이라는 기분이 들었고, 가짜가 되는 것 같았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이리 저리 찾다 보니 독서 애호가들이 하나 같이 하는 것은 독후감 적기였다. 진짜 감상평을 적거나 책 내용을 요약하는 등 방식은 달랐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그렇게 챕터 별로 꼼꼼히 정리를 하거나 등장인물의 관계성을 도표로 정리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결국 나중엔 독후감을 적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책마저 멀리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과 이상의 교차점(?)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마음에 와 닿는 문장들만 따로 기록했다가 필사를 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조각난 내용들을 떠올리기에 도움이 될 뿐, 온전한 내용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나는 왜 기억하고 싶을까? 영화든 책이든 유희거리로써 그 순간을 재미있게 즐겼다면 된 것인데 말이다. 기억이란 것은 보이지 않는 서랍이다. 정보가 필요한 순간 우리는 그 서랍을 열어 정리된 기억을 꺼내 온다. 그러나 필요할 때 어느 서랍을 열지 모른다거나, 열었어도 그 안이 텅 비어 있다면 그 만큼 아쉬울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내가 기억하고 싶은 이유이다. 내가 예술을 접하는 목적에는 순간의 재미가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 안에서 나 자신 혹은 타인의 삶을 예술에 비추어 이해하거나 특정 순간에 어울리는 장면들을 적절하고 세련되게 비유하고 싶다. 나라는 인간 딱 한 사람의 인생만 살아볼 수 있기에, 다른 이들이 먼저 지적이고 솔직한 방식으로 펼쳐놓은 삶과 그 설명 방식을 흡수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굳이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내가 향유한 작품을 온전히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기에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기억 속에 간직하고 싶다. 그 안의 모든 것을 다 소화시켜 언제든 툭 치면 툭 나오게 만들고 싶은데 그러려면 결국 기억 해야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선명한 기억을 위해선 암기라는 것이 필수로 동반되어야 한다. 마치 공부하듯 일부러 해당 정보를 뇌에 넣기 위한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좋아하는 분야의 취미는 하기 싫은 공부보다 훨씬 쉽고 자연스레 익혀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세세한 정보는 결국 인위적으로 외우는 과정이 필요할 가능성이 높다.
기억하고자 하는 열망과 시간을 투자하는 암기의 귀찮음 사이에서 나는 결국 늘 귀찮음의 손을 들어왔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대부분의 콘텐츠에 있어서는 그럴 것이다. 좋아하는 것들에 부담감을 씌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고, 어쨌건 관심 없는 다른 분야의 것들 보다는 이미 수월하게 뇌리에 박히는 것들이 많다는 점도 있다.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내게 그리 큰 임팩트가 없었던 작품들이었을테고, 다시 봐도 새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 아닐까. 사실 다 변명 일지도 모른다. 쉽게 모든 작품을 기억할 수 있다면 난 그렇게 할 테니 말이다. 결국 기억과 지속가능성 사이의 해답으로 오늘도 난 관람한 영화 리스트를 추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