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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잊고 싶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타닥거리는 불꽃 소리에 기대어 쓰는 작은 이야기

by 최은파 에디터
2026.04.29 18:20

 

 

모닥불 에세이 본문 이미지.png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온기

부드럽게 번지는 불꽃의 형상과 타오르는 듯한 타이포그래피를 결합하여, 모닥불의 역동적인 에너지와 고요한 밤의 분위기를 추상적으로 재해석한 에디터의 창작 이미지입니다.(김신지 『기록하기로 했습니다』에서 발췌한 에세이 제목)

 

 

나는 불빛을 오래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무언가를 태우며 스스로를 조금씩 덜어내야만 빛을 낼 수 있어서일까. 불빛 앞에 서면 소란하던 마음이 가만히 멈춘다. 모닥불이든 초 한 자루든 그 앞에 앉으면 시간이 조금 더 천천히 흐르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묘하게도 그 느릿한 틈 사이로,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슬그머니 얼굴을 내민다.

 

유난히 긴 가을 저녁이면 더 그렇다. 햇살이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어둠이 밀려오고, 공기 중에 불에 그을린 냄새가 섞여들 때가 있다. 그 냄새를 맡으면 초등학교 시절의 캠프파이어 밤이 떠오른다. 전교생이 채 백 명도 안 되던 작은 학교였는데, 그해 가을 우리는 근처 학교 학생들과 함께 1박 2일 캠프를 떠났다. 온종일 웃고 달리느라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몰랐다. 해가 지고 나자 운동장 한가운데에 커다란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거대한 불길 주위에 모여 앉아 우리는 작은 비밀을 털어놓기도 하고, 타닥거리는 불꽃 소리를 들으며 온기를 나누었다.

 

불길이 서서히 잦아들 무렵,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손바닥만 한 초를 하나씩 나눠주며 친구들끼리 둘러앉으라고 했다.


“이 불빛을 바라보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부모님을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는 다들 키득거리며 웃기 바빴다. 초등학생 눈에는 그런 상황이 그저 쑥스럽고 어색하게만 느껴졌을 테니까. 하지만 쌀쌀한 밤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촛불을 응시하는 사이, 운동장은 어느새 고요해졌다.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도 따라 흔들렸고, 그 빛이 서로의 눈동자에 닿을 때마다 작은 반짝임이 번져 나갔다.

 

갑자기 누군가 울음을 터뜨렸고, 금세 옆자리에서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남들 앞에서 슬픈 기색을 보이는 게 쑥스럽기도 했고,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냥 옆에서 울고 있는 친구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아, 이제 금방 집에 가잖아” 하고 어설픈 위로를 건넸다. 그때 내 손 안의 촛불이 바람에 휘청였는데, 그 모습이 꼭 내 마음 같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아슬아슬하면서도 어떻게든 끝까지 타오르던 그 작은 불빛 말이다.


그날 밤의 나는 감정이라는 걸 제대로 다룰 줄 몰랐다.

 

그리움이나 벅차오름 같은 단어들은 내게 너무 멀고 생소했다. 하루의 끝엔 언제나 웃음이 있었고, 울음은 금방 잊혔다. 세상은 단순했고 마음은 가벼웠다. 정말 슬픈 일이 없었다기보다, 슬픔을 깊이 느낄 만큼 세상을 넓게 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누가 아픈 것도, 딱히 상처받을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가끔은 이유 없이 마음이 무거워지곤 한다.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관계, 속절없이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 불쑥 찾아오는 공허함이 나를 눌러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문득 그 가을밤의 캠프파이어가 떠오른다.

 

그때 나는 울지 않았지만, 울고 있는 친구들의 등을 다독였다. 그 작은 손길이 어쩌면 내 마음이 내준 첫 번째 ‘따뜻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감정을 표현하는 게 서툴던 시절에도 누군가를 달래주려 애썼던 그 마음. 지금 생각하면 그게 내 안의 작은 불씨가 된 것 같다.

 

모닥불은 언젠가 꺼지지만, 불이 남긴 재는 오랫동안 따뜻하다.

 

그 안에는 아직 다 타지 못한 진심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바쁜 하루 사이로 나를 스쳐 지나가는 많은 것들 속에서, 그 따스한 재를 조심스럽게 쓸어보곤 한다.


밴드 페퍼톤스의 노래 중 <캠프파이어>라는 곡이 있다. 노래 소개글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여정이 길어질수록 점점 쌓여가는 추억들 하나하나가 우연히 모닥불 앞에서 만나 모여 잠시 쉬어 가는 순간처럼 기억되면 좋겠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마음 한쪽이 훈훈해지는 걸 느꼈다. 오래전의 어린 나와 지금의 내가 한 모닥불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장면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 불 앞에서 나는 아무 말 없이 불꽃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미소 지을 것 같다. 어쩌면 참아왔던 눈물을 펑펑 쏟을지도 모르겠다. 그 옆에는 그때 울던 친구도, 손안에서 일렁이던 작은 촛불도 함께 앉아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모닥불 하나씩을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하루가 너무 빠르게 흘러갈 때, 마음이 가라앉아 중심을 잡기 힘들 때, 그 불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살만해진다. 그건 아마도 그 불이 대단한 행복이나 대단한 추억이 아니라, 우리가 잊고 싶지 않았던 수많은 감정을 태워 남긴 온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툴렀지만 언제나 진심이었던 그 순간들의 온기 말이다.

 

그 불빛은 아직 내 안 어딘가에서 은근하게 타오르고 있다. 오래전의 쑥스러웠던 웃음과 이름 붙이지 못한 따뜻한 마음들이 지금의 나를 천천히 데워준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불빛 앞에 앉는 걸 좋아한다.

 

그 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게 주어진 일들을 해내느라 정신없이 돌아가던 세상의 속도가 잠시 멈춘다. 그리고 내 안에서 작은 모닥불이 다시 타닥거리며 피어오른다. 잊고 싶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그렇게 내 마음을 천천히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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