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이라는 이름의 여자 _ 아트나인 재팬무비페스티벌
현실을 보여주고 그 이후의 단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영화들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회의 뒤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불편한 진실,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 혹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제시한 후에 어떤 희망적인 결말을 제시하지 않고 그걸로 끝이 나는 영화들이 있다.
나에게는 <아노라>가 그랬고, <안 이라는 이름의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을 제시한 후에 정말 나아지지 않고 거기서 그걸로 끝.

흔히 노란장판 감성이라고 불리는 정서의 영화들을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보는 걸 고통스러워 하기 때문이었다. 현실은 현실이고 영화는 영화이니 영화에서만이라도 긍정적인 결말을 보여주고, 무언가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해야할까. 더 나아가서 그렇게 현실을 ‘사실 적시’만 하고 끝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라는 생각까지.
하지만 어떤 삶은 보여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어떤 삶은 영화나 연극처럼 클라이막스가 존재하지 않고 그냥 하나 둘 나쁜 일들이 쌓이다가 어느 순간 끝이 나기도 한다. 그런 삶들은 누군가가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바로 옆에 있다 하더라도 감춰지고 지워진다. 그런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안’ 이라는 이름의 여자는 어린 시절 학대와 착취 속에서 자란 ‘안’이 마약에 손대며 망가진 인생을 살다가 좋은 어른들을 만나 다시 사회로 편입하는 과정을 그린다. 재활 모임에 참여하며 새 삶을 꾸려 나가고 학대하는 가족에게서도 벗어난다.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냉소적이고, 과거의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으며 안은 끊임없이 좌절한다. 좋은 어른들을 만나 일자리를 구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일자리를 잃게 되고, 믿을 만한 어른이자 안을 사회로 다시 편입시켜준 형사 타타라의 성추문 사건이 터진다. 게다가 보호소의 모르는 여자는 다짜고짜 안에게 찾아와 아이를 맡긴다. 그 아이가 안에게는 또다른 살아갈 희망이 되어주지만, 잊을 만하면 안에게 찾아와 돈을 벌어오라고 하는 그녀의 엄마 때문에 안은 자꾸만 절망에 빠진다.
희망이 찾아올 만하면 자꾸만 절망이 계속된다. 기반이 없이 무너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정상’이라 말하는 곳까지 올라오는데도 몇 번이나 제자리로 돌아간다.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속한 사람, 특히 여성은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가. 차곡차곡 쌓인 나쁜 일들은 결국 해결되지 못한다. 극적인 순간에 목을 매는 게 아니라 그냥 조용히 그걸로 끝나는 삶도 있다는 연극 속 대사가 떠오른다(연극 마우스피스).

누군가가 그렇게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도와줄 수 없는 것도 전부 고통스러운데 해결되지 않는 일로 점점 포기하는 주인공을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힘이 든다.
희망은 얄궂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은 채로 올라가면 또 금방 손을 놓고 만다. 안에게는 타타라, 키리노가 그랬을 것이다. 느리지만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준 사람들이자 동시에 자신의 손을 놓은 사람.
여전히 이러한 삶을 보여줄 때 한톨의 희망이라도 있기를 바란다. 그게 영화니까. 영화가 현실을 반영한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이건 영화고, 그렇기에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 이런 삶들은 때로 보여지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남긴다. 잊혀지고 지워지는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는데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안 이라는 이름의 여자는 사회에서 지워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