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인생의 해상도를 높인다.
<위험한 그림들: 세계사를 바꾼 결정적 순간>의 가장 앞 날개에 적힌 문구다. ‘현실의 온전한 재현’을 기록 예술이 추구해야 할 제일의 목표로 본다면, 미술 회화보다 목표에 더욱 잘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술의 하위 분야란 여럿 있기 마련이다.
미술은 현실의 장면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복사해 내는 예술은 아니다. 움직임, 소리, 입체감과 같은 생동감을 그대로 전하는 예술은 더더욱 아니다. 미술은 정적이며 재해석의 여지가 무한하다. 그러나 미술이 정적이며 재해석의 여지가 무한한 예술이기 때문에 오직 미술에서만 가능해지는 ‘전이’의 순간이 있다.
미술은 시간을 멈추어 한 면으로 담아낸다. 다른 기록 예술이 예술가 본인이 머물러 있는 객관적인 시간의 일부를 멈춘다면, 미술은 예술가 자신이 ‘느꼈을’ 시간을 멈춘다. 미술은 물리적 감각에 기반한 재현일 수도 있고, 주관적 인식에 기반한 재현일 수도 있다. 동시에 미술은 상상에 기반한 창조일 수도 있고, 현실과 해석을 적절한 비율로 배합한 혼합물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미술은 삶의 한 순간을 담아내는 동시에 삶의 한 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거대한 무언가를 담아낸다.
<위험한 그림들: 세계사를 바꾼 결정적 순간>은 역사와 궤를 함께해 온 미술작품을 지면에 옮겨, 읽는 이로 하여금 그러한 ‘전이’를 경험하게 한다. 미술작품과 그 배경에 얽힌 설명이 만나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 뒤에 숨겨져 있던 이야기를, 역사서의 활자로는 그려지지 않았던 인물들의 감정을, 무엇보다도 온 후대가 그 존재를 알되 온 후대가 영영 그 내막은 몰랐을 역사 속의 여러 ‘삶’들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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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매체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튜더 왕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인 그레이라는 이름을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잉글랜드 튜더 왕가의 방계인 제인 그레이는 불과 아흐레 만에 여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처형당한 비운의 열여덟 살 소녀라는 극적인 흥미 본위의 묘사로만 널리 알려져 있곤 했다. 그런 제인 그레이의 삶이 바로 이 책의 지면에서 폴 들라로슈의 작품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을 만나 보다 검박하고 보다 진솔하게 그려진다. 권력과 비인간성과 탐욕의 복판에서 고전하며 스스로 원하는 대로 삶을 꾸릴 기회를 일절 만나 보지 못했을 제인의 삶이, 제인을 둘러싼 다수의 힘겨루기와 일말의 온정이, 목전으로 다가온 죽음을 맞이하는 제인의 이야기가 시대를 거슬러 눈앞에 전해진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개인의 총체가 ‘시대’라는 이름으로 겪었던 비극 역시 책 안에 묘사되어 있다.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 장 레옹 제롬의 <노예시장>을 비롯한 당대의 노예 무역을 다룬 그림들이 그 못지않게 사실에 가까운 기술과 함께 묘사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냥하여 사고파는 모습, 보험사와의 계약에서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노예’들을 바다 아래로 밀어넣는 모습이 감추어지지도 과장되지도 않은 설명과 함께 페이지 위에 실려 있다.
톰킨스 해리슨 매티슨의 <마녀 검사>,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중세에서부터 시작되어 초기 근대 17세기까지 대륙을 넘나드는 ‘사업’이 되었던 마녀사냥의 맨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존 싱어 사전트의 <가스전>, 크리스토퍼 네빈슨의 <의사>와 <영광의 길>은 당대의 눈으로 바라본 제 1차 세계 대전의 모습을 가감없이 후대에 전한다. 그림이 글을 만날 때 압축되어 화폭 위에 도사리고 있던 시간은 비로소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어 보는 이에게 전이된다.
<위험한 그림들: 세계사를 바꾼 결정적 순간>에서 소개되는 그림과 그 그림들이 전하고 있는 삶들은 결코 빈말로라도 가볍고 평온하다고는 할 수 없을 종류이다. 이들이 멈추어 전이시키고 있는 시간이란 시대의 혼란이며 격동이고 때로는 역사의 실수이다. 그러나 이 혼란과 격동과 실수를 누군가는 외면하지 않은 채 화폭에 담아내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시대를 건너 그 화폭을 마주하며 너머의 삶들을 직시한다.
미술과 글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 ‘시대’를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거듭되는 한, 인류의 발자취는 결코 혼란과 실수만으로 점철되어 있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위험한 그림들: 세계사를 바꾼 결정적 순간>은 바로 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가장 해상도 낮은 예술인 미술은 삶의 해상도를 가장 크게 높인다. 한참 떨어진 과거의 지점을 바라보는 미술은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가장 먼 미래에까지 넓혀 제시해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