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살아야 하냐는 질문은 난감하다. 질문을 받자마자 막힘없이 이유를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좀처럼 답을 하지 못하거나 살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삶으로부터 소외되고 밀려나 죽음 쪽으로 돌아앉은 사람을 다시 살도록 설득하기란 매우 어렵다. 무엇이 이들의 '삶의 이유'가 되어줄 수 있을까. 연극 <키리에>는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지 이야기한다.
바닥도 벽도 검은 무대. 이곳은 어떤 한국인 여성 건축가가 설계한 집이다. 천재라 불렸지만 젊은 나이에 자신이 만든 이 집에서 과로사한 그는, 깨어나보니 집이 되어 있었다고 독백한다. 기껏 집이 되어도 하는 일은 사람일 때의 기억을 형벌처럼 곱씹는 것뿐. 누군가 살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방치되어 아무도 찾지 않는 집의 모습은 살아생전 표현에 서툴러 가까운 사람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못했던 건축가의 삶의 연장선 같다. 설상가상 집이 있는 곳은 '검은 숲'. 나무가 빽빽해 한낮에도 볕이 들지 않는 이곳은 스스로 생을 끝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일종의 '자살명소'이니, 더더욱 '살러 오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
25년간 비어 있던 이 집에 엠마가 아픈 남편과 함께 들어온다. 검은 숲을 찾는 다른 이들처럼, 죽기 위해서다. 무용수 부부였지만 남편은 병으로 무용을 못 하게 되었고, 죄책감과 남편의 질시에 못 이겨 엠마 역시 스스로 계단에 굴러 무용수 생활을 끝냈다. 남편의 병은 가망이 없기에 이제 그는 이 집에서 남편을 죽이고 자신의 삶도 끝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에도 연습과 준비가 필요하다. 엠마는 이 집을 스스로 죽으러 가는 사람들을 맞는 여관으로 운영하며 자신의 죽음을 향해 갈 계획이다.

처음에 집은 무작정 자신의 안으로 쳐들어 온 엠마를 불청객으로 여긴다. 그러나 집은 자신이 사람이던 시절 젊은 엠마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에우리디케 역을 맡아 애처롭고 슬퍼야 하는 장면에서 이상하게 홀로 밝아서 혹평을 받은 동양인 무용수에게 그는 깊은 인상을 받았더랬다. 그때와는 딴판인 엠마를 보며 집은 엠마를 신경 쓰기 시작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를 돌본다. 기억을 곱씹으며 후회하는 일을 오랜만에 멈추고 집으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계절이 지나는 동안 몇몇 사람이 여관을 찾는다.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삶을 마감하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삶보다 죽음을 더 친근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엠마는 손쉬운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자신 역시 스스로의 죽음을 계획한 사람으로서 따듯한 밥 한 끼와 편안한 잠자리, 그리고 직접 만든 버섯초콜릿을 내어줄 뿐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여기서 보내는 짧은 시간은 이들이 죽음을 유예하도록 만든다. 버섯초콜릿을 먹고 보게 된 죽은 반려견의 환각이나 유체이탈하듯 자기 자신을 내려다본 경험, 같이 묵게 된 다른 사람과의 맥락 없는 대화가 이들의 마음을 잠깐이나마 바꿔놓았다.
그러나 엠마의 결심은 확고하다. 집은 그런 엠마를 그냥 두고만 볼 수 없다. 엠마를 자기 안에 들이면서부터 무엇인가가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엠마는 집에게 더 이상 상관없는 타인이 아닌 것이다. 엠마가 목을 매려는 절박한 순간, 집이 생각한 방법은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자신은 파괴되지만 엠마를 살릴 수 있다. 집은 망설이지 않는다. 아마도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여기에 집으로 25년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지금 이 순간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마지막 장면까지 보고 나면 작품의 제목인 '키리에'에 생각이 머문다. 키리에란 가톨릭에서 주님을 칭하는 말이다. 우리는 현실이 괴로울 때 돌파구처럼 신을 찾는다. 현실을 초월하는 어떤 존재가 우리를 구할 것이라 믿으며 자비를 배풀어 달라 애원한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괴롭게 하는 현실에 있는 것들, 그중에서도 타자의 존재다. 침범과 교차는 불편하고 껄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타인과의 눈맞춤과 부딪힘은 나로만 구성되어 있던 세계에 다른 파동을 만들어내고, 다른 결과를 가져다준다. <키리에>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나에 대해 골몰하고 내 안으로 침잠할수록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 살아야 하는 이유는 희미하게만 보인다. 어쩌면 우리의 삶의 이유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평생, 그리고 죽어서도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살다가 엠마를 위해 무너짐으로써 비로소 안식에 든 건축가(집)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키리에'란 내 옆의 누군지 모를 당신을 칭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서로를 가엽게 여기고, 잠시나마 서로의 집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