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영화로 처음 접했던 작품이다. 당시 영화를 보고 스토리와 연출 모두 강하게 인상에 남았고, 자연스럽게 원작 웹툰까지 찾아봤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번 뮤지컬에는 오히려 큰 기대가 없었다. 이미 완성도가 높은 서사를 가진 작품이고, 영화 역시 충분히 잘 만들어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걸 뮤지컬로 어떻게 더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시놉시스라는 점은 분명했기에 가벼운 호기심을 안고 엄마와 함께 공연장을 찾았다. 그리고 그 의구심은 작품의 초반부터 빠르게 사그라들었고 그 누구보다도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공연장을 나서게 되었다.
‘온도차’를 높은 완성도로 만든 뮤지컬
뮤지컬 '은밀하게 위대하게: THE LAST'는 2016년 초연 이후 10주년을 맞아 대극장 규모로 확장된 시즌으로, NOL 씨어터 대학로 우리카드 홀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라는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온도차’라고 생각한다. 원류환이라는 인물 자체가 남한에서는 동네 바보로 살아가지만, 사실은 북한의 최정예 요원이라는 이중적인 설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이중성은 작품 전체의 구조와 분위기를 끌고 가는 핵심 장치로 작동한다.
초반부는 밝고 엉뚱한 분위기이다. 코믹한 장면들이 이어지고, 관객이 부담 없이 웃을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원류환의 본래 모습의 비중이 점점 늘며 작품의 분위기는 급격히 무거워진다. 캐릭터와 작품에 온도차가 존재한다는 건 그만큼 이 이야기가 입체적이라는 뜻이며 그 입체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장면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이중성을 매끄럽게 만들어가며 동시에 전개도 빠르게 하여 지루할 틈을 만들지 않았다. 캐릭터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핵심 장면들만 쏙쏙 골라 이 시놉시스의 매력을 강조하는 동시에 빠른 전개로 몰입을 강화했다. 관객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장면만 골라 보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도 감정선이 끊기지 않는 치밀한 설계라고 느껴졌다.
뮤지컬이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
본 뮤지컬에서는 뮤지컬 넘버와 군무도 감정을 전환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밝고 경쾌한 넘버는 가벼운 분위기를 강화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더 많이 등장하는 군무는 정제되고 통제된 움직임을 통해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모든 음악과 군무는 장면의 흐름을 끊지 않고 이어가는 역할을 했다.
또한 무대 연출 역시 인상적이었다. 배우들의 동선이 무대에만 머무르지 않고 관객석까지 확장되면서 관객은 단순히 공연을 ‘보는’ 입장이 아니라 그 공간 안에 함께 있는 듯한 몰입감을 느꼈다.
여기에 더해 전반적인 연출에서는 젊고 트렌디한 감각이 많이 느껴졌다. 특히 리해랑이라는 캐릭터는 기존의 이미지에 케이팝적인 요소를 덧입히며 보다 위트 있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된다.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지금의 감각에 맞게 변주하려는 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었다.
배우가 완성한 설득력
특히 이번 공연은 어느 한 명도 어색하거나 부족하다는 느낌 없이,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완성도를 보여줬다. 배우 간의 호흡 역시 자연스러워, 충분한 연습을 거친 무대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원류환 역의 김찬호 배우와 김태원 역의 김수용 배우는 무대 위에서 확실한 중심을 잡아주었고, 특히 김찬호 배우와 리해랑 역의 서동진 배우는 서로의 호흡이 잘 맞아 장면의 밀도를 높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세 주인공 캐릭터의 표현이었다. 원류환, 리해랑, 리해진 모두 단순하게 소비될 수 없는 입체적인 인물들인데, 배우들은 각 인물의 양면적인 감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며 관객이 몰입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가장 좋아했던 리해진이라는 인물이 역시나 이번에도 가장 인상 깊었다. 순수하기 때문에 더 올곧을 수밖에 없는 캐릭터, 그리고 그 순수함 안에 조국에 대한 신념과 원류환에 대한 동경이 동시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민규 배우는 이 복합적인 감정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해석하여 캐릭터의 매력을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작품이 걸어온 10년의 길
사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이미 대중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2016년 초연 이후 10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아 왔다는 점은 ‘은밀하게 위대하게: THE LAST’만의 독보적인 매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 공연을 통해 느낀 것은, 이 작품이 그 익숙한 이야기를 뮤지컬이라는 형식 안에서 완성도 있게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었다. 기존의 시놉시스가 가진 매력을 뮤지컬이라는 형태 안에서 극대화하고, 음악과 연출, 배우의 연기를 통해 그것을 무대 위에서 유기적으로 풀어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히 잘 만든 공연이라는 인상을 넘어 왜 지금까지 계속 무대에 오르고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했다.
처음에는 큰 기대 없이 찾은 공연이었지만, 공연장을 나설 때는 오히려 같은 배우들의 무대로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이 작품은 스스로의 완성도로 관객을 설득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