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을 앗아간 곳, 내 것이라곤 없는 땅에서 그는 묵묵히 꽃밭을 가꿨다.
"그애가 올 거야, 그애가 올 거야."
그애의 이름은 쥬리프. 군인 출신에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일한 야마토와 일본인 여성 에리코의 아들이다.
쥬리프를 기다리는 것은 쿠로. 조선인인데다 얼굴이 까마귀처럼 까맣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를 '조선 까마귀'라고 불렀다. 학교 정원사인 그를 '쿠로 씨'라고 불러 주는 것은 '쥬리프'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두 사람은 학교 정문과 가장 먼 곳에 있는 정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빨간 튤립이나 노란 튤립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세상에 있는 듯 없는 검은 튤립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느덧 졸업을 앞둔 쥬리프는 자신의 집으로 쿠로를 초대한다. 연극의 뜻밖의 방문자,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쿠로가 쥬리프의 집에 등장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비극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시작했다. 연해주의 끝자락 연추, 튤립이 가득 피어 있던 곳에서 전쟁을 나갔던 야마토는 방금 갓 태어난 듯한 아기를 훔쳤다. 절대로 넘겨주지 않겠다고 따라붙는, 힘이 다 빠진 아기의 엄마를 죽인 후였다. 아기의 아버지가 곧 온다는 말을 무시한 채 야마토는 아기를 데리고 달아났다. 뒤늦게 튤립 밭으로 온 쿠로를 기다리는 것은 싸늘하게 죽어 새들의 먹이가 되어 가고 있는 아내의 주검이었다. "한 남자가 아이를 데리고 저쪽으로 뛰어가더라"라는 말 하나 얻은 쿠로는, 그곳을 뒤쫓았지만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두 남자는 야마토가 관직에 오른 후에 재회한다. 야마토는 자신을 찾아온 쿠로의 입을 다물게 하는 대신 학교의 정원사로 취직시켜 주지만, 이 또한 또다른 아픔의 시작이 됐다. 연극 <튤립>은 전쟁과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이 낳은 개인의 아픔과 비애를 그렸다. 해소되지 않는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 쿠로(막산)의 삶과 감정을 집요하게 파헤친 작품이다.
극단 '돌파구'의 작품 <튤립>은 오랜 시간 쌓여 온 막산의 상처와 야마토의 한 순간의 선택으로 달라진 그의 가족을 통해 전쟁과 폭력이, 혹은 어떤 선택이 한 사람의 삶을 어디까지 바꿔 놓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막산과 쥬리프는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막산은 자신의 아이를 훔친 남자를 쫓아 도쿄로 왔고, 쥬리프는 자신의 핏줄을 알지 못한 채 일본인 가정의 아들로 살았다.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것만 알아냈을 뿐, 그 뒤에 가려진 더 큰 진실은 알아내지 못한다.
막산은 자신의 아들인 쥬리프를 눈 앞에 두고도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쥬리프가 정의한 대로 그의 '친구'로서 옆에 남았다. 봄마다 다시 만나자는 제안도 지키지 않은 채 침묵을 택하는 인물이 막산이다. <튤립>이 더 비극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사랑하는 이를 앞에 두고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만이 아니다. 모든 아픔을 막산 혼자 감당하고 책임지며 '선택당한' 죽음으로 끝을 맞았기 때문이다. 치유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치유받지 못한 것이다.
다만 <튤립>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진실은 드러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긴다. 모든 진실을 감춘 채 자신의 꽃밭에서 죽어간 막산. 그리고 그런 막산을 기다리는 쥬리프에게 다가온 것은, 진실을 알고 있는 또 다른 인물 '미호'다. 연극은 미호가 쥬리프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쥬리프가 곧 떠나고자 하는 곳이 히로시마라는 점에서, 막산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쥬리프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미호의 비밀스러운 선택에 관객은 집중하게 된다.
극단 '돌파구'는 <구미식>, <고목>, <아이들>, <그게 다예요>, <날나다 버린 새> 등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우리 사회가 직면한 청소년, 젠더, 정치, 사회의 모습을 탐구해 왔다. 그중에서도 <튤립>은 역사와 사회가 개인에게 내린 상처에 주목한 작품이다.
"튤립은 꽃이 아니라 구근을 기르는 식물이다"
"진정한 정원사는 때로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가꿀 줄 알아야 한다"
막산이 튤립에 대해 하는 말이다. 막산으로써 오랜 시간 뿌리 내려 온 구근은 어떤 변화를 만들지 물음표를 찍으면서도, 더 이상 치유될 수 없는 그의 상처에는 마침표가 찍히길 바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