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던 것과 달리 모처럼의 광화문은 화창했다. 퇴근시간, 역으로 향하는 인파를 거슬러 익숙한 길을 걸어갔다. 오고 가며 건물을 여러 번 본 적 있었지만 영화 관람을 위해 방문하는 것은 처음인지라 조금 떨렸다. 생각해 보니, 나의 첫 독립영화관 방문이었다.
영화관 내부는 아날로그적인 매력이 풍겼다. 매표소에서 표를 건네주는 직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멀티플렉스 극장에서는 보기 힘든 종이 전단지가 한 곳에 비치되어 있었고, 벽면 곳곳에 포스터가 배치되어 있었다.
상영관이 2개밖에 없는, 입장 시간이 되면 육성으로 입장시간이 되었다고 공지하고 검표를 하는 곳. 독립영화관은 처음이었지만 그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극장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극장의 시간들>은 씨네큐브 25주년을 기념하는 영화로 총 세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독이 과거 경험했던 침팬지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침팬지>, 아역 배우들의 자연스러움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현장을 담은 <자연스럽게>, 극장이라는 공간 속 서로 교차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의 시간>. 각각의 단편들에는 영화와 영화관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침팬지>에는 2000년의 광화문이 등장한다. 비디오방 광고가 붙어있고 헌책방이 줄지어 있던 그때에도 극장은 존재했다. 2025년, 비디오방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헌책방마저 폐업 정리를 하는 순간에도, 극장은 버젓이 남아 과거와 다름없이 우리의 곁을 지키고 있다.
<자연스럽게>에서 아역 배우들은 즐겁게 웃으며 길을 걷다가도, ‘감독’역의 배우가 화면에 나타나 좀 더 자연스럽게 해달라고 요청하면 금방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도 뭐가 다르단 거지? 중얼거리는 모습은 아이다운 순수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계속된 소통 끝에 배우들의 연기는 점차 자연스러워지고 종래에는 모든 스태프가 배우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모습이 스크린에 담긴다.
아이들의 장난과 그들을 통제하기 어려워하는 ‘감독’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해당 장면이 아이들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레 우려져 나온 것이라 생각하다가도, 그것이 영화관의 스크린 속에서 재생되고 있음을 고려해 보면 과연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인지 궁금증이 생긴다. 영화와 현실, 촬영과 놀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영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더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고 만다.
<영화의 시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함께 빵을 나눠먹는 매표소 직원과 청소 노동자, 극장 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연락이 끊겼던 오랜 친구, 영화를 보기 위해 반차까지 내고 헐레벌떡 뛰어오던 관객 등등.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그들은 스크린에 영화가 상영되는 순간만큼은 같은 목적을 지니게 된다. 영화를 보는 것.
그리고 그 영화를 구성하는 것은 단순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만도, 영화를 보는 사람만도 아니다. 극장을 청소하는 사람, 관리하는 사람, 틀어주는 사람. 영화를 보다 잠에 들어 대사 한 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예매 날짜를 착각해 잘못된 날 극장에 온 사람. 극장을 스치는 모든 이들이 영화를 이루는 조각이 된다.

<극장의 시간들>은 세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 하나의 이야기가 더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바로 영사기사 이야기이다.
처음 영화가 시작되면 스크린에는 나이 든 영사기사의 모습이 비춰진다. 실제로 씨네큐브에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그는, 어린 신입 영사기사에게 일을 가르쳐주며 영사기사로서의 일상이 어떤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기차 소리가 들려오며 <침팬지>가 시작된다. 영사기사는 세 개의 단편이 끝난 후에 다시 등장한다. 이번엔 신입 영사기사 홀로 영사기를 관리한다. 필름을 감고, 영화를 틀고, 작은 공간에서 밥을 먹는다.
내가 아는 영화관의 공간은 오로지 스크린과 좌석뿐이었기에, 영화의 시작과 끝이 이뤄지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이 너무나 낯설게 다가왔다.
영화가 영화관의 모든 구석구석을 비춰주고 있기 때문일까. 극장에 불이 켜지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그전에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빛을 내고 있는 영사기, 화장실에서 마주친 청소 노동자, 늦은 시간 텅 비어버린 영화관 로비, 역으로 가는 길 들려오는 영화 이야기.
극장이, 그것도 독립영화관이 25년이나 유지된 것은 그 자체로 영화에 대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보여준다. <극장의 시간들>을 보고 나면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나의 사랑 또한 그 안에 담겨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