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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정말로 피곤하다. 너무나도 피곤하다. 출근길 지하철에 잔뜩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 없는 잿빛 얼굴을 보면 죽음을 기다리는 행렬처럼 보이기도,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눈만 끔뻑거리는 좀비 떼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대인의 고질병으로 항상 언급되는 만성피로는 남 일이 아니다. 주 6일 근무가 보편적이던 2000년대와 달리, 현재는 주 5일 근무에 탄력·유연 근무제, 재택근무까지 도입되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더 피곤해할까. 오죽하면 성과사회를 지적하는 책 <피로사회>가 출간되었을까. 비극적인 일상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폰 가갸 씨다. “9시, 사무실 출입문이 폰 가갸 씨를 기운차게 연다. [...] //12시, 점심이 그를 잘도 먹어 치우고/때가 되면 오줌이 유유하게 그를 갈긴다. [...] 시간이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하면서/이윽고 월급 봉투가 그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는다./6시 반, 54번 버스가 다시 폰 가갸 씨를 올라탄다. [...]//현관문이 그를 열고 집어 넣는다./따뜻한 방바닥이 그를 때려눕힌다.”(최승자, 「폰 가갸 씨의 초상肖像」). 때가 되면 일터로 끌려가고, 일이 나를 지배하고, 다시 때가 되면 집으로 홀린 듯이 끌려온다. 내가 삶을 산다는 듯한 주체적 감각보다는 삶이 나를 살아내는 것 같은 무력하고 사물화된 감각이 더 익숙하다. 이처럼 도처에 깔린 허무를 비롯해 생의 비극, 나아가 죽음의 이미지를 최승자는 이 시가 담긴 시집 『즐거운 일기』에서 완벽하게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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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일기』에서 시인은 지금 여기를 어떻게 응시하는가. 쳇바퀴처럼 돌아가고, 고통이 지속되며, 어떠한 의미도 발견할 수 없는 객체화된 삶이다. 시인은 우리 소시민과 다를 바 없이 “철저한 조건 반사의 기계가 되어/아침엔 밥을 부르고/저녁엔 잠을 쑤셔 넣”는다(「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또 “치정처럼 집요하게 우리는/죽음의 확실한 모습을 기다”리며(「나날」), “자고 싶어도 죽고 싶어도/누울 곳” 이 없는(「오늘 저녁이 먹기 싫고」) 상태로, 발 딛고 기댈 자리 하나 없이 헤맨다. 이곳에서 “우리들의 발은 일 피트 높이에서 영원히 땅에 닿지 못하고”(「고요한 사막의 나라」),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발목”이다(「망제望祭」). 모래로, 또 모래바람으로 가득 찬 이곳, “애인은 비명횡사”하고 (「고요한 사막의 나라」), “동의하지 않아도/봄은” 오는 이곳(「봄」)에서 시인은 “죽고 싶음의 절정에서/죽지 못”하며(「비극」) “두드려라, 안 열린다”며 신의 자비가 있기라도 한 건지 의심하며 비웃는다(「시간 위에 몸 띄우고」). 이 세계는 “죽음이 나보다 먼저 누워/두 눈을 멀뚱거리고 있”으며(「오늘 저녁이 먹기 싫고」), 세월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앞에서 쳐들어온다,/야비하게 복병한 죽음을 싣고서.”(「고요한 사막의 나라」). 그러면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딧물이 벼룩을 낳고 벼룩이 바퀴벌레를 낳고 바퀴벌레가 거미를 낳”는 악순환이 계속된다(「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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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동시에 시인은 죽을 만큼 살고 싶어 한다. “그래, 끊임없이 나를 호출하는 전화벨이 울리고/나는 피해 가고 싶지 않았다./그 구덩이에 내가 함몰된다 하더라도/나는 만져보고 싶었다, 운명이여. [...]/헛되고 헛됨을 완성하기 위하여”라며 내게 속수무책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운명, 언제나 곁에 있는 고통을 직시하려 한다(「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시인은 “고요한 사막의 나라가 아닌 곳”을 원한다. 죽음으로 또 동시에 태초로 돌아가는 그곳에 마침내 당도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시집 전체에 만연하다. “어느 날 나는 나의 무덤에 닿을 것이다./관 속에서 행복한 구더기들을 키우며/비로소 말갛게 깨어나/홀로 노래 부르기 시작할 것이다.”는 고백은 비극의 극치에 닿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다짐이다(「주인 없는 잠이 오고」). “하지만 어쨌든 이 물을 건너갈 수밖에 없다./맞은편에서 병신 같은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비극」)에서 볼 수 있듯, 시인은 좌절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이 세계 너머를 상정하고 또 소망한다.


얼핏 보면 죽음과 비극의 나열로 이루어진 허무의 냄새 가득한 신세 한탄이지만 사실 시인은 누구보다도 삶을 노래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시집은 낭만주의적이다. 문학사에서 낭만주의 사조란 현실의 모든 것을 회피한 채 저 너머로 달아나고자 하는 태도가 아니라,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묘사함으로써 진실에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함으로 인해 더 나은 세계에 가닿을 수 있는 방법적 논의가 가능해진다. 그로테스크한 것과 희망의 빛을 동시에 또 그 무엇도 삭제하지 않은 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낭만주의의 정수이며 이를 발견하는 독자는 자연스레 깨어난다.


시인은 따라서 현실이 어떤지를 안다. 얼마나 더럽고 추하고 오물이 들어 찬 시궁창인지 안다. 무엇을 해도 의미 같은 건 없고 원치 않아도 반복되며 죽음으로 저벅저벅 걸어간단 것도 안다. 그러므로 어떻게 저 너머로 가는지도 안다. 완성된 헛됨의 세계, 무의 세계, 태초의 거기, “죽음 다운 죽음이 환히/비치는 곳”으로 열심히 나아간다(「고요한 사막의 나라」).


피곤한 우리네 삶은 그래서 사실은 하나도 안 즐겁다. 얕게 생각하면 “아싸라비야”지만 결국 “도로아미타불”이다(「즐거운 일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알고 있거나 이제 막 알게 된 폰 가갸 씨들은 “새로운 눈을 달고[....]//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20년 후에, 지芝에게」). “보이지 않는 발목들의 낮은 헤맴을/한반도 막막한 보편으로 흐르게” 해야 한다(「망제望祭」).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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