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마텔의 소설 'Life of Pi'
한편, 박정민 배우가 연기한 '파이'라는 캐릭터는 영화의 그것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입체적이었고, 사실상 홀로 내러티브를 이끌고 소화해 내며 관객에게 전달하는 몰입감이 탁월했다. 비록 소설과 영화를 미리 접한 상태에서 연극을 관람한 관객의 입장에서는 두 개의 상반되는 이야기가 맞물리고 충돌하는 방식이 다소 단순하여 결말부에서 핵심이 되는 청자의 상상과 그 확장성이 제한적이라는 부분은 아쉬웠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무대 연출 등 전반적으로 호평받을 만한 요소가 가득했던 공연이었다.
장르적 성격을 떠나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작품이 갖는 특별함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마주한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스스로 서사를 재구성하고 이야기의 외연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작품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시각에서 그것을 내면화할 수 있다는 점에 놓여있다. 작품이 전반부부터 강조하는 종교적 다원성은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한 인간의 삶에 대한 해석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산재해 있으나 그 낙착점을 종교로 볼 것인지 인간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분명하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기에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이번 기회를 빌 오랜 세월 신학의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어온 '부정 신학'의 관점을 통해 이야기를 조명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도 소설과 영화 그리고 연극까지 세 번의 감상 기회를 갖는 동안 해석의 범주를 종교로 한정하여 오롯이 작품을 고민해 본 일이 없기에 새로운 감상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무한한 신, 무한한 술어
'위(僞) 디오니시우스'는 중세 유럽에서 성행했던 스콜라 철학의 가장 중요한 학자 중 하나로, 스스로 사도 바울의 제자를 가장하고자 '디오니시우스'라는 가칭을 사용했다. 그는 완성했던 부정 신학의 원형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이어져 이후 아퀴나스와 에크하르트를 넘어 오늘날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부정 신학의 논지란 "신은 무엇이다"가 아닌 "신은 무엇이 아니다"라는 주술 관계 속에서 신의 무한함과 절대성을 찾아가는 것으로, 인간의 유한한 술어는 반드시 무한한 신 존재를 왜곡하게 되어 몰이해로 귀결된다고 말한다. 이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속 이반 카라마조프가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사실을 왜곡하게 된다"라고 주장한 것과 그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신은 사실이라는 차원에 놓여있는 존재가 아니다. 위 디오니시우스가 인간의 사유와 언어는 결코 신 존재에 가닿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이미 인간은 신 앞에서 무엇이 사실인지 분별할 수 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음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말씀의 주체를 모호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적은 인간의 언어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지점에서 의심을 갖는다. 진실로 신이 말씀하신 것인가? 신은 진실로 선하신 것일까?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결국 인간이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테두리 안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납득할 수 있다면 받아들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상이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은 "이해 뒤에 믿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 뒤에 이해가 온다"고 말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믿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언어이기에 인간의 술어는 필연적으로 "신은 무엇이다"라는 규정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헤겔의 부정성 개념을 떠올려본다면, '이것'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을 구별해야 하며, '나'를 확정하고자 한다면 우선 '나 아닌 것'을 부정해야만 한다. "신은 무엇이 아니다"라는 서술 뒤에는 결국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할 수는 없으되 다만 믿음의 문제가 남는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독자 및 관객에게 제시된 두 가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하나는 파이가 리처드 파커와 함께한 신비롭고 환상적인 이야기, 다른 하나는 배가 난파된 후 생존자들의 비극적인 생존 이야기로 나뉜다. 이때 서로 대립하는 두 사건 중 관객은 무엇이 정말 있었던 일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파이의 첫 번째 이야기를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보험사 직원의 회의적인 태도에 파이는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다 이해하기 쉬운 논리와 사실의 영역에 놓인다. 하지만 파이는 둘 중 무엇이 더 납득할 만한지 묻지 않는다. 오히려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냐고 물으며 사건을 믿음의 문제로 환치한다.
이때 파이가 들려준 두 번째 이야기, 즉 비극적 진실은 일차적으로 부정된다. 진실은 우리의 합리성에 부합하는 비극적 현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호랑이와 함께 그토록 긴 시간을 바다에서 표류하며 생존했다는 비현실적인 허구의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가? 그것은 믿고자 하는 사람의 자유다. 다만 첫 번째 이야기 역시 동시에 부정된다. 진실은 우리가 꾸며낸 환상도 아니다. 현실과 환상이 나란히 병치된 것일 수도 있고 현실과 현실이, 환상과 환상이 한꺼번에 제시된 것일 수도 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경의 이야기 역시 그렇지 않은가? 어차피 호랑이와 살인자의 존재는 '한 인간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바다에서 생존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라는 질문 뒤에 오는 것이다. 여기서 파이가 던지는 질문이 작품의 핵심 메세지가 되는 까닭은 어느 한쪽을 부정함으로써 다른 한쪽을 확정하게 되는 구조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부정 신학에서의 신 존재 논증 또한 위 구조와 다르지 않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을 부정하더라도 우리가 사는 현실이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부재의 가능성은 언제나 현존에 내재한다. 우리는 파이와 함께 그의 이야기를 상상했을 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위 디오니시우스가 침묵 속 신과의 합일을 주장한 것은 언어는 인간의 길이지만 침묵은 신의 길이기 때문이다. 파이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모든 이야기를 마치고 난 후에 찾아오는 침묵이 관객으로 하여금 파이의 이야기가 신의 이야기로 도약한 것임을 알게 한다. 그렇기에 <라이프 오브 파이>는 화자와 청자의 침묵이 맞닿아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이다. 침묵할 수 없는 사람은 눈앞에 노아가 현전하여 대홍수와 방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Si comprehendis, non est deus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그와 같은 침묵이 찾아왔던 순간은 한 번이 아니었다. 배의 침몰은 사람들의 고성, 동물들의 울음소리, 물건들이 물에 휩쓸려 부딪히고 부서지는 소리 등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가장 결정적인 침묵을 내포하고 있다. 배가 침몰하는 사건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러워서 그것이 하나의 극적 요소와 장치 이상의 의미를 획득하는 지점을 쉽사리 파악하기 어렵다는 생각까지 든다. 배의 침몰 장면을 소설과 영화, 연극은 각각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우선 원작 소설의 경우, 여러 챕터에 나눠서 해당 장면의 서사를 설명하고 있으나 텍스트가 지닌 고유의 한계로 인해 명시적으로 침묵을 드러내는 순간은 발견하기 어렵다. "The ship sank. It made a sound like a monstrous metalic burp. Things bubbled at the surface and then vanished. Everything was screaming: the sea, the wind, my heart. From the lifeboat I saw something in the water." 독자의 호흡이 텍스트의 호흡보다 느리기 때문에 설령 텍스트에서 의도적인 침묵을 삽입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동일한 층위에서 독자에게 감상되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영화의 경우, 한 쇼트에서 바다로 가라앉는 '두 대상'(파이와 배)을 일직선상에 위치시켜 그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침묵 속에서 연출한 명장면이 떠오른다. 이때 배는 더는 유지될 수 없는 파이의 세계임과 동시에 배에 승선한 인원들 외에도 다수가 배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실제적 사건이다. 그러나 구명보트는 오직 파이의 이야기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 실와 허구를 동시에 선언하는 무언가, 존재적 불능과 부재 속의 현존을 총체적으로 실현하는 무언가로서 자리한다. 따라서 작품이 배의 침몰이라는 사건을 분기점으로 삼아 '바다'와 '뭍'으로 공간적 배경을 양분하였을 때, 이것은 이미 두 개의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바로 그 침묵의 쇼트가 결정적인 이유 또한 이와 같은 의도적 단절의 장치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며, 관객은 기존의 언어와 상상이 단절되는 것을 느끼며 또 하나의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관객은 부정 신학과 마주한다.
마지막으로 연극은 배의 침몰 장면을 원작 소설의 표현 방식과 흐름에 충실하되 무대의 암전을 통해 '바다'와 '뭍'의 본격적인 단절을 드러낸다. 이후 연극의 2부에서 관객은 파이의 절규와 반항을 들으며 그가 보여주는, 오직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내러티브를 따라가다 마침내 두 개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사실 관객은 이미 배가 침몰하는 장면을 통해 '뭍'에서 사건을 다루고 해석하는 방식을 '바다'의 사건에 적용할 수 없음을 인지해야 했고 배가 침몰한 이후부터 전개되는 이야기를 무엇을 위해, 어떻게 부정할 것인지에 대한 고찰을 요구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연극의 연출이 부정 신학의 관점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무대의 암전이 단순한 의미적 단절을 넘어 위 디오니시우스가 주장한 본질적 암흑과 교차된다는 것이다. 부정에 부정을 거듭할수록 인간은 심연과도 같은 암흑 속에서 신과의 합일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암흑을 구성하는 것은 표징으로서의 언어가 아닌 신의 침묵이다.
Si comprehendis, non est deus.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이 말의 의미는 "네가 하나님을 이해했다면, 이미 그분은 하나님은 아니다"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부정 신학이 갖는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엇을 이해할 수 있고 무엇을 이해할 수 없을까.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벵골 호랑이가 태평양 한가운데 구명보트에서 인간과 함께 존재했다는 이야기와 살인과 식인의 이야기 중 무엇을 사실의 영역으로 남겨둘 수 있는 것일까. 두 이야기 모두 사실이면서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부정 신학의 관점에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미 인간의 언어를 떠난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 표현은 생각과 같지 않고, 생각은 실재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Which is the better story, the story with animals or the story without animals?"에서 'animals'를 'God'으로 바꾼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모두 부정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지는 이제 너무나 자명하다.

파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한 명의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이 작품이 잊히지 않고 연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나타나 주어서 너무나 기뻤는데요. 글을 읽으면서 또 이 이야기가 지닌 매력을 새삼 느꼈습니다.
'파이라는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독자(혹은 관객) 스스로 서사를 재구성하고 이야기의 외연을 확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작품에 저마다의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그것을 내면화하게 된다.'
왜 이 작품은 여러 번 보아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더 좋아지는지!
볼 때마다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되는 작품인 것 같아요. 파이라는 인물과 그를 둘러싼 상황은 그대로여도 그의 이야기를 지켜보는, 제 속에서 변화된 지점을 자꾸만 마주하게 됩니다.
나태한 감상자를 일으켜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선택해 보게 만드는 작품,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이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느끼게 해 주는 작품은 드무니까요.
'이해 뒤에 믿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 뒤에 이해가 온다.'
어떤 것을 보고 납득할 만하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납득할 수 있고 보지 못해도 충분하다는 말이겠죠. 언젠가 저도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는데, 항상 실패했거든요.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어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는 존재를, 그 언어를 통해 납득하여 믿어보려던... 다시 보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였네요.
믿음 뒤에 이해가 오는 것이라면, 믿음 자체는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일지.
믿음도 노력으로 가능한 영역일지.
절대자를 향한 믿음을 포함하여, 삶에 대한 굳은 신념조차도 제대로 지니지 못한 사람으로서
열등감 비슷한 걸 가지고 살아가며 속에서 믿음에 대한 의문 또는 환상을 키워왔던 것 같은데요.
무언가를 믿는 마음이, 더 나은 이야기를 선택하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내 삶을 더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선택을 하면 될 뿐이니. 조금은 가뿐해지는 것 같습니다.
침묵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작품을 감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영화에서의 침몰 장면과 연극에서의 독백이 끝난 후 나타나는 침묵을 기점으로 파이도, 관객도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게 된다는 해석도 인상 깊었습니다.
한 작품에 대한 감상을 적더라도 자기만의 시선을 녹여내는 부분이 좋아 보여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