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많은 노래만큼이나 많은 가수가 있다. ‘노래하는 사람’을 가수로 칭한다면 세상에 가수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고(우리 모두가 적어도 한 번쯤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려본 적은 있을 것이므로), 그렇다고 가수를 ‘노래를 잘하는 사람’으로 한정한다면 그 기준이 모호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가수를 잃거나 얻게 될 테다. 그러니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가수의 보편적 정의는 불가능하며 불필요한 것이고, 우리는 단지 나의 가수 혹은 우리의 가수를 찾아 듣고 보고 기억할 뿐이다. 요즘은 나의 가수 여럿 중 한 명의 노래를 반복해서 재생하고 있다.
가수 최백호의 노래를 듣는다.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 <낭만에 대하여> 중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이 노래로 최백호를 만났다. “옛날식 다방”에서 “짙은 색소폰” 음악을 들으며 “도라지 위스키”를 마셔보라는 권유다. 옛 감성의 음율과 생소한 가사에 먼저 즐거운 미소가 번졌으나, 1977년에 데뷔한 가수의 노래를 뒤늦게 반복해서 들으며 나는 제대로 가져본 적 없이 벌써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생각하게 됐다. 결국 나는 만들어진 의도와 상관없이 이 노래의 정서를 미련보다는 어떤 희망으로 결론 짓고 말았다. 낭만이라니. 이토록 무참하게 아름다운 단어를 “청춘의 미련”이, 혹은 가능성이 아직 남은 나이에 새삼 다시 발견한 것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벅차오름이었다.
먼 아주 멀리 있는
저 바다 끝보다 까마득한
그곳에 태양처럼 뜨겁던
내 사랑을 두고 오자
푸른 바람만 부는
만남도 이별도 의미 없는
그곳에 구름처럼 무심한
네 마음을 놓아주자
- <바다 끝> 중에서
그러니까 가수 최백호는 잃어버린 것들을 자꾸만 노래하는 사람이다. 잃어버린 낭만에 대하여 노래하던 힘 있는 목소리가 차분히 내려앉았을 때, 그가 잃었음을 고백하는 또 다른 무언가는 “태양처럼 뜨겁던 내 사랑”이다. 그러나 이번 ‘잃음’의 형태는 ‘분실’이 아니라 ‘유기’다. 열정적이었던 사랑의 온도가 점차 내려가 더는 따뜻하지 않게 됐을 때, 이 사랑을 이어가거나 붙잡을 수 없다고 느끼게 됐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사랑을 놓아줄 먼 곳으로 떠날 준비한다는 것. 그곳은 바다의 끝처럼 “만남도 이별도 의미”를 잃게 되는 최초이자 최후의 공간이다. 우리는 차가워진 마음을 두고 오기 위해 그곳으로 떠난다. 육체로 떠나는 이별 여행이거나, 마음으로 떠나는 이별 여정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끝내 함께 도달한 그곳에서 내 사랑의 잔열은 완전히 식고, “구름처럼 무심”해진 당신의 마음은 자유롭게 흘러 떠나갈 테다. 죽은 것을 떠나보낸 자리에서 사랑은 다시 산다. 그러나 스스로 놓는 것 또한 잃는 슬픔이라서, 이 노래를 부를 때 최백호의 얼굴은 슬퍼진다.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 지면 서러움이 더해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눈길을 걸으며 눈길을 걸으며
옛일을 잊으리다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안개 속에 가로등 하나
비라도 우울히 내려 버리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중에서
내가 떠나보내는 일이라면 이별의 공간을 정할 수도 있겠지만(<바다 끝>), 나를 떠나려는 사람에게마저 그렇게 할 수는 없을 테다. 이별은 언제나 불공평하게 찾아오므로,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 찾아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끔찍한 시간을 잠시나마 늦추는 것뿐이다. 그러니 당신은 갈 수 없다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비는 것이다. 슬픔의 상징물로서 “낙엽”은 핑계일 뿐이고 “차라리 하얀 겨울”까지 이별의 시간을 잠시 미루려는 것이다. 여름이었다면 가을까지만, 봄이었다면 여름까지만, 하고 이별의 상환을 한 계절 미뤄달라 부탁했을 것이다. 지금 당신이 떠나면 “내 마음 갈 곳을 잃”는다. 한순간 갈 곳이 없어지면 마음은 굶고 헐벗고 병든다. 그러니 찌질해도 당장은 빌어야 한다. 이처럼 마음을 살리기 위한 간절한 미련이 상실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최백호는 안다. 그래서 당장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목소리로 그는 노래한다.
잘 가라 나를 떠나가는 것들
그것은 젊음 자유 사랑 같은 것들
잘 가라 나를 지켜주던 것들
그것은 열정 방황 순수 같은 것들
그렇게 믿고 다치더라도
나는 또 누굴 믿게 되겠지
그렇게 아픈 사랑이 끝나도
나는 또 누굴 사랑하겠지
그러니 잘 가라 인사 같은 건
해야겠지 또 무섭고 또 아파도
매일이 이별의 연습이지만
여전히 난 익숙해지지 않아
- <나를 떠나가는 것들> 중에서
너무 많이 잃어봤으니 이제는 잘 잃는 법을 알게 된 것일까. 2022년도에 최백호는 다시 작별의 노래를 부른다. 떠나가는 것들을 떠나보내는 노래. 그것들 중에는 “젊음 자유 사랑”처럼 나의 마음(의지)과 상관없이 떠나가는 것들이 있고, “열정 방황 순수”처럼 변해버린 나의 마음이 아깝게 떠나보낸 것들이 있다. 그러나 최백호는 그것들 애써 잡아두거나, 아쉬워 되찾아오려 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 때나 아무데서나 이별하기로 한다. 그는 이제 “잘 가라 인사 같은 건 해야겠지” 덤덤히 배웅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됐다(이 곡에서 최백호는 시종일관 작은 성량의 낮은 음계로 노래한다. 반면 이 곡을 함께 부른 정승환의 목소리는 보다 감정적이어서 마치 이별마다 앓던 젊은 최백호를 듣는 것만 같다). 그는 이제야 상실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마침내 상실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작별의 긍정적 논리는 이별 후에 새로운 만남이 있다는 것이다. “배웅은 또 다른 마중”이라는 진실. 그러나 그것은 도통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서, 매일이 그리고 평생이 “이별의 연습”이었던 그조차 겨우 “보내야 오겠지 / 내일이 또 그렇듯 / 또 흐려지겠지” 중얼거릴 수 있을 뿐이다. 상실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다만 천천히 흐려질 뿐이라는 것. 그러나 온 힘을 다한 이 중얼거림이 삶의 어느 경지에 오른 가수의 위대한 노래라는 것을, 이별을 겪어본 우리는 안다. 최백호의 장르는 잃음이다. 무언가 잃어버린 최백호는 장르가 된다. 아니다. 최백호는 우리가 된다. 그러니 또 다시 잘 가라, 인사 같은 걸 건넨다. 나의 한 해, 우리의 2025년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