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 글을 읽게 될 사람에게.
저는 저를 소개하는 일이 언제나 어렵지만, 오늘만큼은 조심스럽게 조각 하나를 건네 봅니다.
저는 늘 여러 방향으로 갈라지는 사람입니다. 충동적으로 반짝이고 싶어 하다가도, 이내 조용히 가라앉아버리기도 하고. 하나의 선을 곧게 긋기보다는, 깨진 조각들을 손에 쥐고 그것들이 어디에 닿을지 오래 들여다보는 쪽입니다.
견디기 힘든 날이면 영화를 보고는 합니다. 저를 잊을 수 있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요. 어떤 이야기는 저를 구하지 못해도, 끝까지 가라앉지 않게 해줍니다. 저는 줄곧 그런 이야기들에 기대어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모자이크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는 합니다. 여러 조각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반짝여 한 장의 그림으로 붙이려 하면 어김없이 틈이 생깁니다. 영화를 사랑하면서도, 과학의 언어가 주는 엄정함에 위로받고, 인간의 뇌와 감정이라는 미로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한 문장에 무너져버리기도 합니다. 밤하늘의 별에 마음을 빼앗겨 천문학 서적을 읽다가도, 다음 날엔 아무 말 없이 헤드셋을 끼고 온갖 장르의 음악에 휩쓸리고는 합니다.
저는 이렇게 흔들리는 사람입니다. 낙천과 비관 사이를 오가고, 분석과 감정 사이에서 길을 잃습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묻고 싶어지는 순간에도 대답은 매번 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규정하는 대신, 그때그때 살아남기 위해 붙잡았던 조각들을 기록합니다.
그러다 보면 저의 조각들은 대개 제 안에서보다 받은 편지들 속에서 발견됩니다. 제가 무심히 건넨 조각들은 그들의 손에서 글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래서 편지를 받으면 오래도록 글을 들여다보고, 손자국이 남은 종이를 매만집니다. 그들의 마음이 좋아서 글자를 머리에 각인하듯 새겨 넣습니다.
“너에게 세 잎 클로버를 선물하고 싶었어. 요즘 너를 보면 행운보다는 행복이 필요한 것 같아서. 그리고 행복하게 살다 보면 행운이 순간 확! 너에게 관심을 갖고 찾아올지도 모르잖아. 너와 친하게 지낼 수 있던 게 나에게는 행운이었고 이제는 행복이야. 그러니 부디 너도 행복하길!”
6년 지기 친구로부터, 23년 9월.
“너와 나눈 것들이 많아서 참 즐거워. 내 인생 혹은 사회생활에 지쳤을 때 너랑 전화하거나 직접 만나서 시간을 보내면 힐링 되는 느낌이더라구.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번 여름에 내가 무너지지 않게 도와줘서 고마워. …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이제야 깨달은 것 같다.”
10년 지기 친구로부터, 24년 12월.
“… 난 항상 너를 절대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에 정말 확실하게 깨달은 것 같아. 이런 사람이라면 내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고, 나도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걸!… 사랑해.”
5년 지기 친구로부터, 25년 3월.
그들의 문장들은 제가 줄곧 외면했던 조각들을 조심스레 집어 올립니다. 저는 스스로를 불안하고 모자란 사람이라고만 생각해 왔지만, 누군가에게는 버팀목이기도, 따뜻한 숨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세상 앞에 가시를 세우며 괜찮은 척 살아가는 저는 간파하려는 듯, 틈 사이로 스며들어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그 다정함이 퍽 따뜻해서 기분 좋게 무너져 내리고는 합니다. 종종 그들이 눌러쓴 진심을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그 손자국이 남은 종이가, 제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는 또 하나의 기록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서야 조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완성되지 않은 조각들로 살아가지만,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그들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장면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나의 사람들이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가진 조각 하나가 누군가에게 닿아버릴까 두려우면서도, 또 언젠가 닿기를 바라는 모순을 품고 살아가겠습니다.
이 자기소개도 그런 마음으로 올립니다.
나의 자기 고백이 어쩌면 당신의 조각과 닿을지도 모른다는, 그 가능성 하나를 품고.
2025년 11월 29일
조심스럽게, 당신에게.
수민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