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에는 대가가 따른다.
당신은 누군가가 눈에 단추를 다는 대신 영원하고도 완전한 행복을 준다고 약속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불길한 제안은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라 완전함을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을 내포한다.
영화 〈코렐라인〉(2009)은 바로 이 유혹과 선택의 문제에서 시작한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대가 헨리 셀릭 감독의 작품으로 흥미로운 스토리와 주제 의식, 긴장감 넘치는 연출로 호평을 받았다. 닐 게이먼의 원작 소설 『코랄린』을 잘 비틀어 서사의 틈을 만들어냈고 여전히 해석이 분분하다. 최근에는 국내 재개봉을 통해 또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어린 시절의 나는 작은 TV로 〈코렐라인〉을 보면서 생각했다. 언젠간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으며 큰 스크린과 웅장한 사운드로 볼 수 있기를. 이제 그 희망이 현실이 되었다.
환상의 문, 그 시작으로 들어가다.
영화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얼마나 쉽게 뒤바뀌는지를 보여준다. 코렐라인이 이사한 집은 어둡고 낡은 저택이다. 부모님은 일이 바쁜 나머지 그녀에게 무관심하다. 즉, 코렐라인에게 집이란 결핍의 공간이다. 자신을 잘 챙겨주는 다정한 부모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긴 틈이 환상 세계로 가는 문을 열게 만든다.
운명처럼 발견한 이 ‘문’은 중요한 서사적 장치로 단순한 이동 통로가 아니다. 환상과 현실, 자유와 통제를 가르는 경계선이자 덫이다. 문 너머에는 그녀가 가진 결핍을 완전히 채운 세계가 있다. 이때 코렐라인의 경험은 라캉이 말한 ‘거울 단계’의 주체와 유사하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거울 속에서 이상적이며 완벽한 자신을 발견하지만, 그 모습에 과하게 몰입하는 경우엔 진짜 자아를 잃어버린다. 다정한 환상 부모와 이웃들, 그 속에서 함께 웃고 있는 코렐라인처럼 말이다. 이 지점에서 문은 거울이며 환상 세계 사람들은 마리오네트로 역할한다. 점차 관객은 화려함에 숨겨진 덫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코렐라인은 문을 넘으며 자유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상 세계에 점차 오래 머무르고자 한다. 하지만 사실 그곳에 발을 딛은 순간부터 벨담(환상 엄마)의 손아귀에 잡힌 것이다. 결국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려질수록, 그 화려함은 점차 균열을 드러내며 붕괴한다. 스톱모션 특유의 느낌은 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데, 부자연스럽게 끊기는 인물의 움직임, 선명한 찰흙 질감은 이곳이 현실이 아님을 강조한다.
눈에 단추 달기 = 행복해지기
벨담에 따르면 ‘단추’를 달면 영원히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나 본질은 자유의 포기이자 감각의 상실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현실에 대한 불안함을 없애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 일종의 조건부 거래다. 라캉 철학에 근거하면 단추 눈은 벨담이 만들어준 이상적 자아를 반사하는 거울의 표면이다. 결국 단추를 단다는 건 코렐라인이 주체적인 자아가 아닌 벨담의 욕망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게 만드는 행위다. 즉, 타인의 욕망 구조에 하나의 부속품이 된다는 뜻이다. 완전한 행복이라는 환상의 위험성이자 스스로 내면의 자아를 뽑아내는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코렐라인은 벨담을 물리치고 부모를 구해 현실로 돌아온다. 직접 문을 봉인하고 자신과 세계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더 이상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현실의 결핍과 불안과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이처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가 공존하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영화는 스노우볼의 입을 빌려 “이 세계는 멋져 보이지만 모두 환상이야.”라고 말한다. 멋져 보이는 환상으로부터 탈출한 코렐라인은 통제된 행복보다 불완전하지만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벨담은 계속해서 코렐라인을 찾을 것이다. 그때마다 단추로 꿰매지 않은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라고 생각한다. 끝내 〈코렐라인〉은 완전한 행복이란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아니면 그것을 좇는 순간 이미 우리는 통제의 세계 속에 들어섰을 수도 있다.
다시금 돌아와 생각해 보자. 우리 앞에는 단추 두 개와 뾰족한 바늘, 실이 담긴 상자가 놓여있다. 과연 벨담이 만들어 놓은 완벽한 환상 속에서 제 손으로 단추를 눈에 꿰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