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체 로르와케르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위대한 작가들의 이름이 떠오르곤 한다. 마르케스나 보르헤스 같은 위대한 작가들. 그들은 영화감독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색채로 예술 작품을 만들어냈고, 아직까지도 ‘고전’의 위치에서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두 작가를 비평하는 말들에는 항상 등장하는 담론이 있다.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말이다.
환상적 리얼리즘이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일종의 서사적 장치다. 모호해진 경계는 환상의 이미지들을 불러오고, 독자의 해석 층위를 하나로 귀결시킨다. 현실은 곧 환상의 기반이고, 환상은 현실의 어떠한 초상적 형태를 지니게 된다. 무엇보다 환상적 리얼리즘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사물, 형상, 상징이 어우러지는 데 목표가 있는 듯하다. 다만 환상과 리얼리즘이라는 의미는 서로 중첩되지 않는다. 요컨대 환상과 리얼리즘의 공존은 그 자체로 딜레마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환상적 리얼리즘을 영화로 구현하고자 하는 감독이 있다. 바로 알리체 로르와케르다.
알리체 로르와케르가 <행복한 라자로>를 세상에 공개했을 때, 환상적 리얼리즘은 그녀의 고유한 무기가 된 듯했다. 이러한 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영화의 운동성을 능동적으로 이용하는 감독의 고유 미학은 환상적 리얼리즘을 그대로 프레임에 옮긴 듯하다. 특히 <키메라>에서 감독이 주도하는 고유의 운동성과 서사는 환상적 리얼리즘의 딜레마 속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모호함을 살려낸다. 그렇다면 <키메라>는 어떻게 환상적 리얼리즘을 프레임에 호명하는가?
![[꾸미기]eeeIMG_1459[크기변환].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07203336_kvxibdii.jpg)
<키메라> 속의 서사는 의외로 선형적이다. 도굴꾼이었던 아르투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지하에 잠든 유적이나 유물들을 감지해낼 수 있다. 유물이나 유적이 지하에 잠들어 있을 때, 아르투는 환상의 경계에서 잠입한 듯한 두통을 느낀다. 아르투와 함께하는 친구들은 함께 도굴을 하며, 비싼 유물들을 몰래 팔아넘긴다. 하지만 아르투에게는 지우지 못하는 상처가 있다. 바로 자신의 전 여자친구 베니아미나다. 그녀가 죽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이따금 아르투의 환상에 침입하며 그 존재성을 남긴다. 전 여자친구의 어머니 플로라 곁에 있던 이탈리아를 만났을 때, 아르투는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도굴하는 일에 반대하고 곧 아르투에게서 떠나게 된다.
아르투와 일행은 지하에서 아주 비싼 조각상을 마주한다.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 있지만, 들려오는 경찰차 소리에 아르투 일행은 머리 조각만 들고 도망친다. 하지만 경찰차는 도굴 조직의 계략이었고, 몸통은 경매장에 넘겨지게 된다. 아르투는 머리를 가져가며 유물에 대한 회고를 시작한다. 환상이 침입한 아르투는 머리를 바다에 던지고, 다시 플로라의 집으로 향한다. 이러한 손해를 메꾸기 위해 도굴 조직은 아르투의 능력을 시험한다. 지하로 억지로 들어간 아르투는 갇히게 되고, 곧 환상을 마주한다.
<키메라>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환상은 베니아미나의 환상일 것이다. 베니아미나가 끼어들 때마다 프레임은 빛을 조절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환상임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 볼 수 있지만, 베니아미나가 가진 환상의 빛은 아르투에게 후회를 야기한다. 이때 인물은 언덕 혹은 꽃이 만개한 공간에 위치하는데, 마치 천국의 이미지와 닮아 있다. 아르투의 시점 쇼트로 이뤄진 환상의 표현은 그 바깥으로 도출될 수 없다. 환상적 리얼리즘을 표현하기 위한 인물이라 보기엔, 베니아미나는 희생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환상의 연출을 위해 인물은 그저 부동의 자세로 남을 뿐이다.
하지만 아르투의 능력이 발휘되는 순간마다 찾아오는 환상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렸다고 볼 수 있는가? 이를테면 베니아미나의 붉은 옷에서 삐져나온 실을 아르투가 잡아 끈다고 한들, 이것이 현실의 경계를 어떻게 모호하게 만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알리체 로르와케르는 시점 쇼트를 넘어, 패닝으로 환상성을 유지한다. 사실 영화의 시선은 시점 쇼트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외부에서 바라볼 수도 있고, 극단적인 클로즈업이나 롱 쇼트로도 유지될 수 있다. 카메라의 운동성은 여기서 발휘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환상의 이미지를 마주하지만, 그것이 영화 내의 현실과 맞닿는다고 착각한다. 이는 카메라 안에서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일정한 리듬 덕분이며, 반복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미지는 위치가 뒤바뀌는 카메라를 마주한다.
아르투가 도굴을 위해 유물을 찾는 과정에서 카메라는 좌우 패닝이 아닌, 상하로 패닝한다. 카메라는 하나의 선상에서 유지되지만 하늘과 땅이 급격히 뒤바뀌며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는 카메라가 상하로 한 바퀴 회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르투는 지하에 묻힌 유물 위에서 주저앉는다. 그 순간 패닝된 카메라가 다시 되돌아오며 아르투를 비춘다. 이는 어쩌면 이미지를 넘어서 카메라 연출을 통해 상징성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지하에 갇힌 유물은 언제나 상승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아르투는 땅 아래의 무언가를 위해 시선을 낮춰야만 한다. 카메라의 회전은 이 둘을 모두 비추기 위해 회전할 수밖에 없다. 형상이 드러나지 않은 채 땅에 묻혀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전제 속에서 말이다.
어떠한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감독이 선택한 방법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카메라의 회전이나 아르투가 가진 능력 자체도 비현실적이지만, <키메라>의 후반부에 이르면 환상은 완전히 현실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머리 조각상을 집어던진 이후, 아르투와 일행은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는 <키메라> 초반부와 수미상관을 이룬다. 초반부에 등장한 인물들은 기차 안에서 똑같이 등장하며, 인물들의 질문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들이 아르투에게 묻는 것은 후반부에서 더욱 직접적이다.
“내 목걸이를 보지 못했나요?”
이탈리아가 아르투에게 한 일갈은 여기서 새로운 함의를 가지기 시작한다. 유물은 결코 산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죽은 자를 위한 것이다. 아르투와 일행은 이를 가볍게 넘겼지만, 환상을 마주한 아르투는 이제 경계가 상실되었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아르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베니아미나의 목소리조차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키메라>의 후반부, 아르투는 유적 아래에 묻혀 있다. 조그마한 불빛을 향해 전진하는 아르투의 앞에 붉은 실이 놓여 있다. 베니아미나의 옷에서 시작된 붉은 실. 그것은 지하 아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르투는 붉은 실을 연신 잡아당긴다. 그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침내 죽음을 통해 환상과 현실의 경계면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환상은 현실을 완전히 대체했다. 아르투는 베니아미나를 드디어 마주할 수 있다.
영화에서 환상적 리얼리즘은 그 자체로 도전이다. 환상이 과도하게 개입되면, 현실이 환상을 대체해야 함을 전제해야 한다. 환상의 현실은 보이지 않는 경계에서 층위를 나눈 듯하지만, 영화는 그 자체로 환상이나 다름없다. 1초에 24번씩 움직이는 착시 현상이 영화의 본질이 아니던가. 어쩌면 환상적 리얼리즘을 표현한다는 말은 옳지 않을 수 있다. 애초에 영화야말로, 스펙터클 혹은 환상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