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1. 친구가 되면 좋을 텐데


  

[크기변환][포맷변환]KakaoTalk_20251012_150455349.jpg

 

 

생각해보자. 늘 ‘결과’만 뒤늦게 접하곤 했다. 이를테면, 무념무상으로 살고 있는데 갑자기 두둥— “이번 콩쿠르는 누가 우승했다!” 이런 식이었다.


지금이야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이 내 완벽한 클래식 메이트가 되어 시기적절하게 소식들을 건네주지만, 그때만 해도 꽤 큰 수상 소식이나 성과가 언론에 실려야만 겨우 알 수 있는 일들이 많았다.


좋은 소식을 접하게 되면, 그 기쁨의 근원지가 궁금해지지 않던가. 어떤 무대를 했을까? 이 순수한 물음을 띄우는 순간만큼 마음이 활짝 열리는 때도 없다. 이미 결과는 나와 있고, 그저 그 무대를 뒤늦게 따라가며 음미하는 자리에서 앉아 있으면 됐다.


다만, 그땐 이 연주자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느끼면서도, 그 소리에 내 생각을 얹어 들어보려 하진 않았었다.

 

“이건 쇼팽이 쓴 곡이래. 근데 기네? 무슨 곡이 40분이나 되나? 중간마다 타임라인으로 끊기긴 하는데… 그래도 긴 거 아닌가? (나야 뭐 좋지만.)” 하고 있었다.


관심은 있었지만, 선율이 조금만 나긋해져도 눈이 스르르 감겼고, 빛을 쏟아내는 구간에만 잠깐 시선이 머물렀다.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은 어떤가. 그래도 네 발자국쯤은 걸어왔나 싶다. 오, 그렇게나 앞으로 왔어? 싶겠지만 — 내가 향한 길의 방향부터 잘 살펴보시라.


앞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로 네 걸음 물러났다. 우리가 정말로 친해지고 싶은 대상이 있다면, 보통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던가? 고개를 어떻게든 더 빼꼼 내밀고, 뚫어져라 눈을 맞추려 애쓰는 게 일반적일 텐데 살짝 다른 방법을 택했다.


왼다리를 크게 뻗어 뒤로 훌쩍 넘었다. 그곳엔 무엇이 있었나? 연극이 있더라. 거기서 오른쪽으로 이동해 보자. 뭐가 있나? 무용이 있다. 이번엔 한 번 더 크게 넘어가 볼까? 이야, 국악도 있네.


클래식이라는 한 우물만 깊숙이 파기엔, 싱그럽게 살고자 애쓰는 사람들의 눈이 온갖 곳에서 반짝이는 걸 알게 되니, 마냥 지름길만 걸어가기엔 아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그 도달 지점에 빠르게 다다르면 좋겠지만, 시선을 살짝만 돌려도 나무가 둘러싼 둘레길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이정표는 왜 또 손글씨로 꾹꾹 써 놓으셨는지 —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수 없다.


후퇴를 하니 시야가 넓어졌다. 왼편에만 있던 시선이 오른편에도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되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좋은 무대들도, 기대 이하의 무대들도 많았다. 어떻게 모든 공연이 다 내 마음에 들 수 있겠는가.


다만, 청자로서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하다 보니 아주 얄팍하게나마 확신하게 된 것이 단 하나 있었다. 내가 공연을 응시하며 느낀 ‘감정’과 ‘생각’이 완전히 엇나간 것은 아니었구나 — 하는 깨달음이다.


보고 싶은 공연과 봐야만 하는 공연의 차이점은 어디서 발생할까. 행하는 자의 손끝에서 나온 결과물을, ‘나’라는 사람의 시선에서는 어떻게 보였는가를 서술해야 한다. 간단한 소감도 좋고, 보완점도 좋고, 좋았던 점을 말해도 좋다.


다만 글을 쓰기 위해선,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키워드나 문장을 확실히 쥐고 있어야 한다.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내가 잘 알아야 한다!

 

아… 이거, 일이 피곤해지는 것이다. 공연이 좋았는데, 문제는 그 ‘좋다’라는 기분 단계에 어떻게 도달했는지를 입으로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남겨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하냐고? 결국 방법을 하나 터득하게 되었다. 그냥 쓰면 된다. 쓰다 보면 나온다(?).


이번 글만 해도 그렇다. 내가 어떻게 쇼팽 피아노 콩쿠르 2라운드 무대 중 하나를 리뷰할 수 있겠는가. 아, 그냥 — 난 몰라용 — 하고 마음을 풀어놓고, 리사이틀을 감상하듯 영상을 귀로 바라보면 될 일이다.


누가 시킨 거냐고? 전혀—. 그런데 왜 봤냐고? 온 세상이,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세상이 이 경연 대회를 즐겁게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주자들에게는 매우 피 말리는 여정이겠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클래스를 꽤 능동적으로 즐길 수 있는 순간들 아닌가. 일반 리사이틀로 들었으면 분명 “이게 뭘까…” 싶었을 텐데, 컴피티션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흥미진진함, 미묘한 긴장감, 그리고 설렘이 밑바탕에 깔리지 않던가.


게다가 이 콩쿠르는 라운드마다 유튜브 라이브를 해 주는데, 그때마다 시청자 수가 꽤 높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걸까. 피아노에 이렇게 진심인 이들이 많구나 — 새삼 체감하게 된다.


나도 저 긴 라운드를 다 담은 영상들을 끝까지 지켜보면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대충 봐도 몇 시간은 소요될 것이고, 하나를 시작하면 왠지 며칠을 꼬박 보게 될 것 같아서 — 가볍게 시작하기가 어렵다.


거기다 쇼팽? 지금까지 여타 리사이틀에서 접한 쇼팽은, 소탈하기보다는 늘 우아했고, 산책하듯 걷기보다는 분명한 속도로 달려 나갔다가도 끝내 돌아오는 사람이었다. 정을 붙이기엔 어딘가 어렵고, 그렇다고 곁을 떼기엔 지독하게도 아름답다.


어딘가 모르게 마음은 향하지만, 쉽게 친해질 수 없는 사람만 같았다. 


그런 내가—그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 생각을 빙글빙글 굴리며 글을 쓰던 중, 이혁 피아니스트의 2라운드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 봐볼까?

 

 

 

2. HYUK LEE – second round (19th Chopin Competition, Warsaw)



 

 

폴로네이즈 F♯단조, Op. 44 [0:08]

폴로네이즈: 폴란드 춤에서 유래한, 주로 3/4박의 춤곡·기악 형식이다.


숭고하고 비밀스러운 걸음이려나. 마음이 가볍지 않다는 건 단번에 알 수 있겠다. 아주 살짝 도발적인 느낌이 가미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겁지 않은 공기 속에서 비장함이 느껴진다. 대단한 과업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굳이 고함을 치며 패기를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애초에 그가 걸어온 발걸음 자체가 이미 우아하다.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고함이 있는 것이다. 장중할지언정, 내보일 가장 큰 선언이 있을지언정 과하진 않다.


3:06, 갑자기 공기가 잠시 가라앉는다. 다시 원점에서 따르륵 시작하는 기분. 왼손이 무겁게 동굴을 그려내는 건 봤지만, 저렇게 생글거리며 오른손보다 먼저 뛰어오를 수도 있구나. 오히려 오른손이 목소리를 눌러 버리니 그 반전이 신기하다. 역할을 나눠가며 노니는 2인극을 보는 기분.


막 엄청난 선명도를 자랑한다기보다, 또렷함을 잃지 않고 소리를 분명하게 컨트롤한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 피아니스트는 저 하얀 건반 위에서 두 손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 사람 눈에는 그저 피아노를 치는 모습으로 보일 법하지만, 귀는 다르게 반응한다. 

 

왼손은 왼쪽 귀로 낮게 도닥이고, 오른손은 오른쪽 귀로 자기만의 음색을 아주 노련하고 정성스럽게 전한다.


뭔가—잘은 몰라도—이건 굉장한 수준의 연주를 굉장히 자연스럽게 듣고 있는 기분이다. 큐레이터가 지금은 세상에 없는 작가의 오래된 소설집을, 공을 들여 필기체로 청중 앞에 펼쳐 보이는 모습 같달까. 읽어 준다기보다 지금은 오히려 ‘묘사하고 있다’는 쪽에 가깝다. 6:45의 작은 순간을 집중해 보시라. 예쁜 수제 초콜릿 하나를 집어 든다.


낭만적이면서도 쉽게 닿지 않는 미묘한 시니컬함이 서려 있고, 마음을 도닥여 주면서도 품 안까지 들이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목가적이고, 귀족적이다가도 한순간 타오르는 강렬함을 번쩍 선사해 낸다.


후반부에 들어설 때는 또 초반부처럼 분위기를 확 휘어잡을 듯하다. 검붉은 세련됨—이게 쇼팽 특유의 결인가? 이상하게 쇼팽을 들을 때는 꼭 옆에 적포도주나 달큰한 초콜릿을 하나 두어야 할 것 같다. 창문은 활짝 열어 두고, 진홍 커튼 하나쯤 걸어 두고 싶어진달까. (내가 귀족이냐)


굉장히 프로그램에 몰입하고 있는 게 보이는데,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은 캐릭터라 좋다. 쇼팽의 작품을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둔 사람. 포근포근하면서도 위엄 있는 쇼팽일까나. 마지막 끝음을 기다리는 시간도 참 좋다.

 

 

프렐류드 Op. 28 7–12 [11:30–16:48]

프렐류드: 본래 본곡 앞의 짧은 도입이었으나, 이후 독립 소품으로도 쓰이는 짧은 곡이다.


No. 7 [11:30] 

아니, 이렇게 짧은 거구나? 4분은 할 줄 알고 멍하니 듣고만 있다가, 갑자기 8번이 시작돼 급히 후진하고 돌아왔다(으하하;). 시각적 이미지를 떠올리기엔 듣기 좋은 노크 소리였다. 잘 들어보시라. 초인종을 한 번 누른 다음에, 두 번의 기다림과 세 번의 노크 소리가 반복적으로 찾아온다.


첫 번째 이후로 되돌아오는 종소리도, 기다림의 형태도, 사라지는 발자국도 모두 다르게 들린다. 처음엔 어땠던가. 시작은 한 발자국 물러나 조심스러웠다면, 두 번째는 조금 더 목소리를 띠고, 세 번째는? 한 번 더 크게 불렀다가 잠시 머문다. 네 번째는 첫 번째와 닮아 있지만, 조금 더 다정한 미소와 함께다. 다섯 번째는 보고 싶었던 이와 눈을 마주한 이의 표정이려나.


No. 8 [12:11]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말발굽이 달려 나가는 소리라고 하고 싶은데, 소리에 윤이 가득하다. 약간 공중에 미묘하게 떠 있는 자기부상열차만 같달까(뭔 소리야). 소리가 땅에 붙어 있진 않은데, 음들은 서로 따뜻하고 반짝거리며 초미세로 뜨개질되어 있다.


이만큼 정교하게 연주할 수가 있구나. 음이 순차적으로 안겨 있는데, 그 체계가 무서울 정도로 분명히 서 있으니 길을 잃을 느낌이 없다. 이별할 때는 이렇게 가볍게 떠나버린다고?


No. 9 [14:01] 

첫 두드림에 이어지는 믿음에 확신이 가득하다. 지금 무선 이어폰으로 듣고 있는데, 양쪽 귀가 소리의 뒷길 한바탕에 놓여 있으니 호화롭다. 굉장히 신중한 한 걸음들이 가득하다. 걸을 때마다 느껴진다. 쇼팽을 얼마나 존중하고 계신 거예요? 마음이 이만큼이나 짙은 거예요?


No. 10 [15:33] 

피아노로 보석 세공을 시작한다. 오른편 끝쪽에서 왼손을 만나러 작은 스파크를 그려 내며 몇 번이나 다가왔으면서, 이별할 때의 손모양은 건조하다.


No. 11 [16:08] 

여지껏 내가 알던 쇼팽 그대로 눈을 크게 뜨고 있긴 한데, 미묘하게 털목도리를 하나 동동 매고 있는 소리들이다.


No. 12 [16:48] 

오엥? 갑자기 달리시네! 아니, 작곡가들은 꼭 이런다니까(;;;). 우리 방금까지 사이 좋지 않았어? 아까 털목도리에 초점 맞춰져 있던 시점은 날아가고, 칼날을 품은 자연물이 전경에 좍— 깔려 있다. 이 양상이 사람일 리 없다. 광활함을 품고 있으니.

 

 

스케르초 제2번 B♭단조, Op. 31 [18:36]

스케르초: 이탈리아어로 ‘농담’을 뜻하며, 교향곡·소나타 등에 쓰이거나 독립적으로도 쓰이는 악장·곡이다.

 

 

물러날 듯 그르릉거리다가, 갑자기 큰 성을 내지르는 것이 네 번쯤 지나갔을 때 또 다른 장난이 시작된다. 이번엔 예쁜 유리 조각이 소리를 쨍그려 놓았다가, 어느새 유순해진다. 그렇게 두어 번 반복되더니, 아까 만났던 다정하면서도 미묘하게 거리감 있는 선율이 다시, 그러나 부담스럽지 않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다 보니 아까 처음의 것이 또 되돌아오네? 작곡가들은 한 곡 안에서도 이렇게 무섭도록 반복을 놓지 못하는 것 같다. 같은 선을 이토록 다채롭게 실뜨기하듯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걸까? 찬란한 파편들이 사방에 흩뿌려진다.


21:37. 갑자기 또 공기가 가라앉는다. 분위기 전환이 이렇게 극적인데도, 그저 다음 장면처럼 이어지는 것을 보면 이것도 연주자의 능력일 것이다. 22:34. 이번엔 투명한 사탕 하나를 툭 내려놓는다. 그렇게 또랑또랑 굴리며 놀다가도, 23:22. 누군가가 반복적으로 마음을 내주려 한다.


같은 말인 것을 아는데도 계속 듣게 되는 것이 있다. 짙은 서정성을 이렇게도 가볍고 부드럽게 희석해주어 좋다. 연주자는 매우 부담스럽겠지만, 듣는 이는 부담이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뒤따라갈 뿐인데도 막힘이 없으니 마냥 좋을 따름이다. 이건 무서운 발길질이 아니라, 당당한 내딛음이다.


다시, 처음의 반복이 되돌아왔다. 왜 이렇게까지 돌아오려는 걸까? 어, 예쁜 유리 조각도 또 나타난 것 같은데. 쇼팽이 이 음표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분명해진다. 아, 연주가 이렇게 잘 됐는데 소나타가 남아있어 박수를 못 치는 이 난감한 상황… (^_^;;)


 

피아노 소나타 제2번 B♭단조, Op. 35 [29:16–48:54]

소나타: 여러 악장으로 이루어진 기악 장르(또는 곡)이다.

 

I. Grave – Doppio movimento [29:16] 

쇼팽의 왼편에서는 확실히 라흐마니노프의 종소리는 없다. 그냥—누른 다음에 한참을 머문다. 동그랗게 원을 그리지도 않고, 앞으로 달려갈 길목의 첫선을 미리 레드 카펫처럼 깔아 두는 것 같다. 그다음의 속도감도 보라. 뭐 저리 세련되게 달리는지 알 수가 없다.


수채화도 아니고 라벤더 향도 아니고, 딱—은은한데 짙은 장밋빛이 맴돈다. 떠오를 때도, 도닥일 때도, 알 수 없게 쫄깃한데 우아하다(뭐지???). 생동감이 있는데도 색감이 파스텔톤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녹진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32:24, 사방에 놓여 있는 조각들을 한 치의 지체도 없이 매우 빠르게 맞춰 내야만 한다. 쌓아 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뭐를? 쇼팽의 마음을. 의도라기엔 보여지는 것들이 진솔하다. 마냥 다정하게 치는 것도, 그렇다고 서늘하게 내어주는 것도 아닌데 사람을 집중시키는 포인트는 뭘까. 34:05를 보시라. 연주가가 뭔가를 모아 가고 있다니까?


II. Scherzo. Molto vivace [34:48] 

달려 나가되 아름다움을 잊지 말라 지시한 걸까? 아니, 쇼팽은 왜 이렇게 끊임없이 달리는 걸까. 내 세상에 찾아온 작곡가들 중에서는 가장 진취적이고, 미적인 요소를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 같다. 내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초월적인 외적인 미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를 잃지 않던가.


그걸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만 같다. 아니, 이런 사람들은 꼭 달리다가도 평화를 되찾아온다니까. 36:10만 봐도 그렇다. 방금까지 뛰어놀던 아이는 어디로 갔나. 또다시 찾아온 가라앉음 속에서 온정 어린 물음과 다독이는 대답을 몇 번이나 보여준다. 저 연주가의 두 손과 하얗고 까만 건반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만 같다.


37:05, 사이가 이만큼이나 좋고, 이만큼이나 분명하다. 반복적으로 돌아오는 것들에 마음을 이렇게 기울여도 되는 걸까. 내가 알던 뾰족한 꼭지점을 가진 쇼팽은 어디로 갔나. 이만큼 따뜻하면서도 귀 기울여 들어볼 수 있구나. 방금의 다정함을 뒤로하고, 다시 한번 내질러 달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또 상승선을 몇 번이나 그리네? 저러다 또 빛을 양방향으로 잔뜩 내뱉겠지. 이만큼 욕심이 많은 사람이구나, 쇼팽은. 뭐 하나를 놓치려 하지를 않네. 저 봐, 또 다독여 주다가 담백하게 가버린다니까.


III. Marche funèbre [40:58] 

처음으로 살짝 낯선 표현이 나타났다. 소리가 한 명이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인데, 어깨는 모두 내려앉았다. 읊조리는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발끝에 달려 있다. 투지가 열 방울이나 맺혀 있다.


울고 있나. 그 시선을 맞춰 볼 수도 없다. 워낙 고개를 깊게도 내리꽂았기 때문이다. 43:34, 어, 한 방울 떨어졌다. 눈물길이 이어진다. 아, 떠나보내는 이를 그리고 있었나 보다. 저 물길이 끊임없으니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 흘러가려나… 가만 지켜보자.


흐느끼지도 못하고 방울, 방울이다. 기다란 방울. 넓다란 소리. 부드러운 포옹. 담백한 손길. 나지막한 기억. 흘려보낼 수 없는 그리움. 아득한 첫 만남. 첫 고백. 사랑. 이별. 이별. 이별…


낯선 표현이 또 한 번, 지금이 흑빛을 걸어가는 길목임을 다시 짚어 준다. 마냥 낭만에 취해 있기엔 바람이 매섭고 차다. 47:29, 달은 왜 또 저만큼 빛나려 하는가. 47:46, 호수는 왜 장엄한 풍경을 감추지 못하는가. 47:54, 사람이 저렇게 작아져 있는데… 또 달이 드리우고, 호숫가는 조금 전의 빛을 반사한다. 머무르는 것에 집중하라는 듯이.


IV. Finale [48:54] 

뭐, 다 지워 버리려고? 잊고 싶은 것들에 마구 헤엄쳐 나오는 사람처럼 마구 양팔을 움직이는 이가 있다. 과도하게 넘쳐나지 않는 저 정도가 신기하다.


계속 튀어오르지 않고 피아노를 두드리다가, 잠을 확 깨워 내고는 또 가볍게 기다린다. 우리는 이별했다. 

 

 

 

3. 여전히 제자리


  

[크기변환][포맷변환]KakaoTalk_20251012_150217291_01.jpg

 

 

오늘 이 라운드를 지나기 전까지 내가 알던 쇼팽의 곡은 뭐가 있었더라.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랑, 저번에 들어본 소나타 하나… 그게 다네? 여기까지 지나오고 나니 연주자들도 연주자들이지만, 작곡가들도 이렇게까지 곡마다 자기 특색을 개성 있게 음표로 찍어 놓는다는 게 참 신기하다.


빈 종이 위에서 시작했을 것 아닌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영감일까? 그냥 흥얼거리다 나온 소리일까? 현대음악은 곡 하나에서 이렇게까지 변주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을 만한 소리’들로만 이루어지진 않았었는데.


안정된 선율, 예측 가능성 속에 있어도 — 다정하지 않으면 생각보다 금세 친해지긴 어렵구나. 오히려 바흐가 한 발자국 더 내어주는 것 같다. 쇼팽은 아예 세계관부터 다른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내가 끼어들기엔 완벽한 체계가 있어서, 구태여 첨언을 넣을 수 없는 기분이랄까. 그저 쇼팽의 이야기를 완전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간편한 어려움. 이상하게 낯설었다. 원래 뭘 듣든 간에 “엥? 이게 뭐야 — 왜 지금 여기서 이런 게 나와?” 하면서 듣는 노래가 다반사였는데 (현대음악이라든가, 현대음악이라든가).


아직 친해지진 못했지만, 다정하고 확고한 음색 덕분에 아주 살짝 — 중간 2분단 정도로 — 건너앉은 기분이 들었다. 건너지 못한 선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왠지 쇼팽의 색을 조금 더 눈치챌 수 있게 된 것 같달까. 아, 이런 느낌을 가진 사람이구나, 하고.


왠지 다른 참여자들의 라운드를 더 지켜보는 재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올라오는 영상만 해도 몇 개인가. 애호가들에게는 이 콩쿠르가 진짜 재미난 시즌이겠다 싶었다. 나도 덕분에 이렇게 안목도 길러 보지 않는가(으하하).


그래서, 너는 이제 뭐 들을 거냐고?

아, 비밀인데… 가까이 오세요.

 

 

…프로코피예프 (도망)

 

 

장유진이 에디터의 다른 글 보기
클래식이랑 서서히 친해지는 중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