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병든 체제와 무력한 인간
우리는 병에 걸렸음을 알지만, 치료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상품의 생산자이자 동시에 거래되는 상품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체계에 의해 착취당한다는 사실이 더 이상 아이러니로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누구나 알고 있다. 물가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받으며 쉼 없이 일해도, ‘확장’이라는 강박에 시달리는 자본가와 같은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이 순간에도 비용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소비되고 폐기되는 비인간 자연이 쇠락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불만을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우익적 포퓰리즘이나 제한된 범위의 사상과 차별에 동조한다. 정치와 시장을 분리하면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외면하고, 사회의 구조적 위기를 개인적·문화적 위기로 치환한다. 그러한 ‘어쩔 수 없음’의 무력감 속에서 나는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제목은 『포식하는 자본주의』이다.
2. 체념을 거부하는 비판의 언어
자본주의 비판서를 많이 읽어왔던 내게 이 책의 제목은 낯설지 않았다. 개인의 불안이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힐 때마다, 나는 대안적 사상을 찾아 여러 저작을 읽어왔다.
그래서 ‘포식하는 자본주의’라는 이미지 또한 익숙했다. 인간이 만든 체계가 인간보다 오래 생존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상징은 현대의 상상 속에서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 역시 단순한 진단서일 것이라는 회의도 있었다. 많은 비판서가 결국 “지금의 체제는 이전보다 낫다”는 낙관으로 마무리되거나, 아예 가상의 유토피아로 도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낸시 프레이저와 라엘 예기의 『포식하는 자본주의』는 달랐다. 이 책은 ‘어쩔 수 없다’는 결론으로 퇴각하지 않는다. 두 사상가의 장기 대담으로 구성된 이 저작은 타협 없는 질문과 논쟁을 통해 문제를 구체화하고, 단순한 비판을 넘어 구조적 돌파구를 모색한다. 물론 명확한 해답이나 처방전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이 책의 가치다. 저자들은 병의 증상을 넘어 원인을 탐구한다. 우리가 앓고 있는 고통의 근본을 해부함으로써, 사유의 치료가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3.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 - 전경과 배경의 포식 구조
책은 총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자본주의를 개념화하는 데 초점을 둔다. 자본주의는 단순한 시장과 생산 체제가 아니라, 경제와 정치, 생산과 재생산, 인간과 비인간 자연의 경계를 설정하고 재조정하는 사회 제도적 질서로 규정된다.
여기서 핵심은 ‘전경’과 ‘배경’의 구도다. 자본주의는 생산과 교환이라는 전경 위에서 작동하지만, 그 전경을 지탱하는 배경, 즉 돌봄·자연·공공성에 의존한다. 전경의 확장을 위해 배경을 끊임없이 포식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시장경제라는 전경은 민주주의적 공공성과 법제라는 배경을 침식하여 정치의 사유화를 초래한다. 임금노동이라는 전경은 돌봄과 가사,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배경을 침식하여 젠더 불평등을 낳는다. 산업경제는 생태계와 자원을 고갈시키며 기후위기를 초래하고, 세계 자본축적은 식민적 수탈과 인종화된 분업을 심화시킨다.
이처럼 각기 다른 영역의 위기와 갈등은 서로 다른 의제처럼 보이지만, 모두 자본주의가 그어놓은 경계를 둘러싼 ‘경계투쟁’으로 연결된다. 자본주의는 배경조건을 무한 자원으로 착각하며 스스로의 기반을 갉아먹어왔다. 배경은 결코 무한하지 않기에, 오늘날 우리가 겪는 사회적·심리적 증상은 자기파괴적 축적이 낳은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자본주의의 위기는 경제적 현상이 아니라 삶의 형식 전체의 위기이다.
2장은 자본주의의 역사화를 다룬다. 자본주의는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각 시대는 경계의 재조정을 통해 위기를 봉합해왔다. 산업자본주의, 제국주의적 식민 자본주의, 국가관리 독점 자본주의, 금융화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등은 모두 그러한 변형의 산물이다. 프레이저는 자본주의의 생존이 착취뿐 아니라 ‘수탈’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분석한다. 임금노동뿐 아니라 돌봄노동, 자연, 식민지 자원 등이 모두 축적의 배경조건이었다. 자본주의는 위기 때마다 새로운 배경을 찾아내고, 그 배경을 소진시키며 연명해왔다.
4. 왜곡된 삶의 형식으로서의 자본주의 -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
3장은 자본주의의 비판으로 초점을 옮긴다. 예기는 자본주의를 경제 체제가 아닌 규범적으로 구성된 사회적 삶의 형식으로 정의한다. 자본주의적 삶의 형식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규범으로 삼아 인간의 욕망과 행위를 통제하며, 사회가 스스로를 학습하거나 반성할 가능성을 차단한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전유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대상화한 채 살아가게 된다. 자본주의는 위기에 대한 왜곡된 반응양식, 즉 스스로의 모순을 봉합하기 위해 더 깊은 모순을 만들어내는 체제다. 예기의 관점은 프레이저의 구조적 진단을 윤리적·규범적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마지막 4장은 자본주의에 맞서는 정치적 실천의 방향을 탐색한다. 그녀는 신자유주의적 진보적 위선을 비판하며, 해방과 사회적 보호를 결합한 진보적 포퓰리즘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정치적 상상은 산업노동자뿐 아니라 돌봄노동자, 이주노동자, 여성, 유색인 등 배경 영역에서 소외된 존재들을 하나의 연대로 묶는 시도이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분할선을 넘어 삶의 형식 자체를 다시 그리려는 실험이다.
5. ‘어쩔 수 없음’을 넘어서는 사유의 힘
『포식하는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경제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구조적 문제로 확장해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의 탁월함은 완결된 해답이 아니라, 두 사상가가 서로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논박하며 사유를 밀고 나가는 과정에 있다. 합의하지 않는 대화, 결론 없는 논증이야말로 이 책의 진정한 힘이다. 그 치열한 대화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어쩔 수 없음’이라는 체념을 넘어서는 비판의 에너지를 발견한다.
물론 이 책은 쉽지 않다. 그러나 시대적 무력감에 시달리는 독자에게, 프레이저와 예기의 사유는 냉철하면서도 뜨거운 희망처럼 다가온다. 『포식하는 자본주의』가 던지는 사유의 불씨가 더 많은 이들에게 스며들어,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힘이 아니라 세상을 다시 그릴 수 있는 사유의 힘으로 확장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