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1.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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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누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던가. 내가 친구를 제외한 지인이나 대화 상대를 ‘선생님’이라 칭하기 시작한 건 만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어디서 배웠나 생각해 보니, 이제 곧 퇴사할 직장에서 얻은 습관이었다. 그곳에서는 서로를 통상 ‘선생님’이라 불렀다.


처음 이 호칭으로 불렸을 때는 꽤 당황스러웠다. 엥, 선생님? 학창 시절에 희망 진로 칸에 ‘선생님’을 단 한번도 적어본 적 없는 내가? 무언가를 가르치며 보람이라곤 느껴 본 경험도 없는 내가, 선생님?


시간이 흘러, 처음의 어리둥절함은 사라졌다. 지금은 이만큼 편한 호칭도 없다고 느낀다. 남녀노소, 신분 불문, 그 하나의 단어에 모두 담기지 않는가!

 

‘선생님’이 무슨 뜻이던가? ‘선생’을 높여 부르는 말이기도 하고,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사람을 대접하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만난 분들은 모두—나 포함—나이 앞자리에 1은 기본적으로 떼고 오신 분들이니 내 나이테 선상에서 보면 내 앞의 계신 당신은 모두 나의 ‘선생님’이다. 


이제는 내게 너무 일상적인 말이 되어 버렸지만, 가끔 호칭이 정해지지 않은 관계에서 내가 자연스럽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상대는 종종 “네? 너무 존중해 주시는 거 아니에요…?” 하고 당황한다. 그 동공지진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죄송해요, 그냥 입에 붙은 말이라 그래요" 하고 변명한다. 놀라셨죠?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거예요. 습관이에요, 습관! 진짜! (손으로 입 팍팍 치는 중)


그렇다면 단순히 지칭을 위해 부르는 ‘선생님’ 말고, 우리에게 진짜 ‘선생님’은 어디에 있을까. 사실 어른이 되고 나면, 지갑을 열어 수강 의지를 밝히지 않는 이상 나를 바르게 이끌어 줄 ‘선생님’은 공식적으로 사라진다. 


그 점이 참 자유롭기도 하지만, 배움을 청하고 싶을 때는 곤란하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을 고를 수도 피할 수도 없었지만, 사회에서는 내가 직접 잘 맞는 스승을 찾아내야 하니 퍽 난감하다.


보통 어떤 루트를 거치던가. 지난 수강생들의 후기를 찾아보며 그와 내가 성향이 맞는지도 살펴보는 게 제일 간단하다. 면밀히 살펴야 할 일 아니던가? 훈육 방식이 나와 맞아야 하지 않겠나. 어떤 사람은 돈을 내고라도 혼나며 배우고 싶어하고, 또 어떤 이는 칭찬과 당근을 한아름 얻고 싶어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왜 안 하셨어요!” 하며 강하게 채찍하는 타입보다는, 부드럽게 타이르는 쪽이나 칭찬해 주는 쪽, 아니면 방임주의 스타일을 자주 찾아다녔다. 알아서 해라, 네 돈이잖아—하는 식의 스타일 말이다.


요즘 내 곁엔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들이 몇 분 계신다. 사실 꽤 많다! 다만 그분들은 아주 비공식적이고, 정작 본인들은 나만의 선생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 그냥 내 마음속에서 몰래 클래식 멘토를 맡아 주고 계신 것이다.


나의 비정규과정 강좌의 전공 교수님은 누구일까. 바로 지금, 무대 위의 클래식 연주자들이다. 그들은 강의실을 옮기듯 여러 공간에서 수업을 펼친다. 서초구에도, 신촌에도, 잠실에도 하나씩. 이 밖에도 수많은 클래스가 있으니 따로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들 흩어져 계신지! (홍대로만 모여 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다면 메인 강의실은 어디냐. 바로 무대 위다. 관객석에 어둠이 내려오고 나만의 소리 수업이 시작되면 제법 바쁘다. 아무도 바라지 않은 숙제를 세상에 내놓아야 하지 않는가. 가만 보면 청강을 하는 셈이다. 그들이 자신만의 예술을 펼치는 동안, 나는 남몰래 에세이 과제를 쓰는 거다.


이런 순간 외에도 ‘진짜’ 클래식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은 무엇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마 가장 대표적인 건 음악 대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겠지. 혹은 문화예술 관련 기관에서 교양 강좌를 듣는 방법일 것이다. 아, 대형 공연장이나 클래식 음반 가게에서도 순수예술 관련 다양한 클래스를 여는 걸 목격한 적이 있다. 책방은 물론이고!


나는 어떤 경험을 했을까. 주로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 한두 공간을 집중적으로 찾았는데, 지난 상반기에는 나만의 방과후 학교가 하나 있었다.


바로 신반포역 근처에 있던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초’다. 이곳은 음악, 특히 클래식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기획했다. 하나같이 내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기에, 나는 한동안 꾸준히 그곳을 찾게 되었다.


요즘은 리모델링으로 행사가 잠시 멈췄지만, 내겐 클래식 공연의 ‘관람’을 넘어 더 넓게 즐기는 법을 여러 갈래로 지도해 준 첫 기관이었다. 약간 나의 초등학교 같았달까.


그곳에서 나는 음악가들이 음악을 대하는 시선과 가치관을 직접 마주할 수 있었고, 그들 인생 최대의 관건인 ‘소리’를 어떻게 다뤄내는지 눈앞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솔직히 전공자가 아니라면 어디서 이런 장면을 접할 수 있겠는가. 많은 성의와 양질의 콘텐츠 덕분에 지금의 내 청취력도 한층 자라날 수 있었다. 너무 자주 찾아가다 보니, 후반부에는 약간 알아보시는 것 같아 민망하기도 했다.

 

나는 마음속에 ‘새로운 문장’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수고가 들더라도 향하기를 멈추지 않는 타입이라, 이 교육 센터에서 흥미로운 주제가 나오기만 하면 망설이지 않고 신반포행을 택했다.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호스트나 연주자로 자주 마주했던 분이 있었는데, 바로 ‘피아니스트 김도현’이었다.

 

처음은 음악 칼럼니스트 이지영과 피아니스트 김도현이 함께 ‘음악이 당신에게 무엇인지’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던 북살롱 프로그램에서였다. 그리고 그때 받은 첫인상은 이러했다.

 

 

하우스콘서트(하콘)에서 독주회를 하시기도 했고, 다른 연주회에서도 이름을 익히 들어 왔다. 다만 실제 연주를 직접 들은 적은 없어, 어떤 음악가일지 궁금했다. 시작 10분 전에 도착했는데 이미 피아노를 치고 계셨다. 편한 차림인 걸 보니 간략한 리허설이었나 보다. (처음엔 내가 지각한 줄 알았다) 그것이 첫 모습이었다.


이지영 칼럼니스트의 소개 후, 정장 차림으로 다시 무대에 나타난 그는 책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피아노와 얽힌 일화, 음악에 관한 생각, 요즘 감명 깊었던 것들(김주환 교수의 『내면소통』)을 들려주었다.


그의 말투는 여느 젊은이와 다를 바 없이 털털했다. 클래식 연주자들을 무대 밖에서 보면, 연주와는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겉으로는 매우 진중한 예술가처럼 보이지만, 목소리와 말의 결은 순박하고 우리의 일상 톤과 닮아 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전공 앞에서 충분히 고통받고 행복해하는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신기했다. 내가 감히 닿을 수 없다고 여긴 장르에서, 완벽한 ‘성공’의 길을 향해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종종 이상화하게 되지 않는가. (속으로 ‘우와… 연주가다…’ 하고)


‘피아니스트’라는 명칭만 들어도 아직 설레는 마음이 있었는데, 김도현과 이지영의 대화를 통해 눈높이를 맞춰 보니 알게 되었다.


그들도 결국은 사람이다. 다만 넘치는 예술심을 ‘악기’를 통해 발산하는, 욕심 많은 예술가일 뿐이다.


첫인상에 이어 운 좋게도 그의 연주까지 들을 수 있었다. 어땠는가? 그는 내가 속으로 ‘우와, 피아니스트다’ 하던 그 모습 그대로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프로 연주자는 관객과 ‘연주를 시작하겠다’ 약속한 순간, 자신을 둘러싼 고유한 ‘존(zone)’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덜컥 내려앉는 것도, 천천히 암막 커튼이 드리워지는 것도 아니다.


카메라 셔터가 찰칵— 하고 닫히는 순간처럼, 그 시작점에 소리로 공간을 감싼다. 음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연주자만의 영역이지만, 곡이 진행될수록 점차 관객에게 다가온다. 때로는 확— 끼얹듯 다가올 수도 있다.


그들은 언제나 악기를 통해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클래식의 매력이 뭘까? 정답지가 없다는 것이다. 해석자마다 제시하는 답안은 모두 다르고, 그 안에 오답은 없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가. 같은 문제에도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는데, 어느 것도 틀리지 않다니. 요즘처럼 자존감이 흔들리고 시국이 복잡할 때, 꼭 필요한 선택지가 아닐까?


주말 오후, 프로그램의 톤에 맞게 한순간에 장악하기보다는 차분히—또 과하지 않게—다가오는 검푸른 밤이 거기 있었다. 그래, 그는 밤하늘 같았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5월 24일의 김도현은 소탈한 밤하늘이었다. 그 당시 나는 클래식 연주자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아주 단순했다.


‘당신은 연주자이고, 유명한 사람이니까 실수 하나 없이, 오차도 없이 완벽한 연주를 보여주겠지?’ 하는 비눗방울 같은 기대가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북살롱 프로그램과 피아노는 내 그 금빛 같은 허황된 방울들을 팡—팡— 터뜨려 버렸다. 어떻게? 나는 도대체 어떤 장면을 목격했던 걸까.

 

 

이지영 칼럼니스트가 관객들과 나누던 대화가 기억난다. 그는 ‘공들인 시간에 대하여’를 화두로 삼아 간략한 인터뷰를 진행하며 인상 깊은 기억들을 전했다. 음악과 연주자를 사랑하고, 또 ‘측은지심’을 품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강연에서도 언급했고, 머리말에도 드러난다.


“이 음악의 끝은 어딘지, 답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는 사람은 실체 없는 압박감과 매일 싸워야 한다… (중략)… ‘음악이 좋아서’라는 답이 돌아온다… 나는 인터뷰하면서 두 번 울었다.”


악기 앞에 스스로를 데려다 놓았다는 이유만으로, 매번 완벽한 이상향의 세계를 그려내야 하는 음악가들의 기쁨과 비애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의 시선이었다. 요즘 나 역시 또래 음악가들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삶과 생각을 종종 곱씹지 않았던가.


예술만큼 평가받기 어렵고 억울한 장르가 또 있을까. 아름다움의 기준 역시 결국 사람이 정한 바 아닌가. 차라리 공부가 더 쉽다는 말이 이해될 때가 있다. (어렵다, 여전히)


‘음악’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 ‘음악’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소리쳐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노골적이고 직접적이다. 거짓 없이 드러나는 형체, 그 속에는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나이브한 마음이 두근거리며 산다.


그것을 평가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잣대로 평이 내 앞에 쿵— 하고 떨어진다면, 그 방향이 어떻든 상당히 부끄럽고 소름이 돋을 것 같다. (우다다—후기를 쓰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앞으로 자주 연주를 보러 다니고 기록을 남길 나는, 어떤 자세로 키보드 앞에 서야 할까. 이지영 칼럼니스트가 좋은 힌트를 주었다.


“클래식 음악은 ‘시간’과 함께 설명해야 할 일이 많다… 연주자가 되기 위한 과정도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감상자가 되기 위해서도 시간이 요구된다… 한번 시작된 이 관계는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맞다. 시간을 가져야 한다. 물론 기록을 남기는 일은 늦지 않을수록 좋다. 감상자의 느낌은 하루하루 쉽게 휘발되지 않는가. 감명 깊었던 지점도 하루만 지나면 무덤덤해져 “그 정도였나?” 하고 희미해지곤 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시간을 가질 것인가. 어떤 연주였든 쉽게 판단하지 않고, 그 하루만으로 연주자를 단정하지 않을 것. 나는 청자이기에 누릴 수 있는 좋은 점이 있다. 바로 ‘비판하지 않을 자유’다.


아쉬웠던 점을 줄줄이 나열할 수도 있지만, 사람 자체에 대해선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조명 아래의 당신과 무대 아래의 당신은 다르다. 무대에서 바라볼 건 그 순간 만들어지는 소리와 화음, 그림뿐이다.


 

무형이니 쉽게 붙잡히지만, 언어로 치환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은 것이 이 음악 세계다. 이걸 다뤄내는 사람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된 과정을 거쳐, 음표가 음악이 되는 순간을 우려낸다. 그래서 악장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의 일면이 얼핏, 혹은 전면으로 비친다.


결국 그렇다. 여타 조건을 다 내려놓고 보면, 나도 사람이고 그들도 사람이다. 나는 손을 무릎이나 키보드 위에 얹었을 뿐이고, 그들은 악기 위에 손을 얹었다가 고개 숙여 인사할 뿐이다. 


도착지나 닿고자 하는 길은 다를지라도, 결국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어쩌면 출발선마저 동일하게 시작하는 것 아니겠는가. 좋아하는 것 앞에서 한없이 흔들리고 고통받으면서도, 계속 그 앞에 서려는 모습이 참 바보 같기도 하다.


여러 생각이 이어질 즈음, 김도현이 의자에서 일어나 피아노로 걸어갔다. 그의 손 아래에서 드뷔시, 쇼팽, 모차르트, 리스트가 차례로 이어졌다. 예습조차 하지 못했고, 생전 처음 만나는 곡들이었는데도 분명히 들려오는 것들이 있었다.

 

 

피아니스트 뒤편에는 오렌지빛 조명이 가로등처럼 놓여 있다. 그 주황빛이 어디를 비추는지 따라가 보자. 연주자의 뒤통수를 타고 내려와 왼쪽 아래 안경테에 반원으로 스며든다. 조금 멀리 보면 피아노 뚜껑을 비추어 검정의 속살까지 드러낸다. 시선을 더 맞추면 검은 러그 위, 연결선의 일부가 드러난다. 그 노을빛을 따라가다 보면 물방울이 동동 떠오른다.


생각과 마음이 붕— 떠오른다. 오른쪽 창밖으로 차가 붕—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온다. 헤드라이트의 강한 빛이 스칠 때마다 이곳이 현실임을 분명히 각인시킨다. 양옆에는 연주자를 지켜보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고, 뒤쪽에는 모두를 감싸 안는 공간의 주체들이 흥미롭게 기다린다. 등 뒤로는 아직 저물지 않은 하얀 햇빛이 등을, 왼편 얼굴을 비춘다.


웃음이 난다. 앞은 흑, 뒤는 백. 양옆은 온기, 뒤쪽은 빛. 대각선으로는 바람이 스치고, 앞편에는 노을이 내려온다. 미지의 공간에 떠 있지만 바로 옆은 일상이다. 아— 이게 내가 이곳에 온 이유다. 아름다운 토요일이네. 이걸 보러 온 거구나? 기쁘다.

 

 

그래, 이런 시간까지 선물 받았었지. 이날을 기점으로 나는 이 공간을 자주 찾기 시작했고, 음악가 김도현을 기억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어떤 행사였더라. ‘음악의 집’ 프로그램에서 피아니스트의 사적인 플레이리스트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얼마나 사적이겠어?’ 했는데, 정말—생소했다. 이 공간에 오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개인 취향이 가득 담긴 노래들이었다. 그때는 너무 당황해 태블릿에 낙서하듯 받아 적었는데, 그 순간 알게 된 밴드 이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핑크 플로이드... 특이한 소가 나를 바라보던 앨범 표지가 스크린에 띄워진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추천해주신 곡은 아직 못 들어봤다.)


시간이 흘러, 식품기업 면사랑이 주최한 신진 유망 연주자 음악회에서 피아노 트리오와 이중주 무대로 그의 연주를 접했을 때, 나는 은연중 결심을 하나 했다. 언젠가 단독 연주를 보러 가야겠다. 


8월쯤이었나. 9월 함안 하우스콘서트 관람을 정해 둔 상태에서, 우연히 리사이틀 공지를 보았다. 날짜는 함안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오후 2시였다. (악!) 이게 소화 가능한 일정인가 싶었지만, 지나온 내 행적이 ‘넌 충분히 볼 수 있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9월 주말마다 예술의전당 간 사람…)


공연 전 조금 하품이 나올지언정, 늦잠을 자더라도 남부터미널로 향할 수 있는 시간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레퍼토리에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가 있었다. 지금껏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곡 위주로 들어왔기에, 피아노로는 어떤 박진감이 펼쳐질지 무척 궁금했다. (어떻게 삐걱거릴까?)


게다가 내가 택한 좌석은 꽤 특별했다. 1층 A블록 1열 1번. 맨 앞, 왼쪽 끝자리였다. 예매 당시 괜찮은 자리가 이미 많이 빠져서 선택지가 한정적이었는데, 한참 고민하다가 한 번도 앉아 본 적 없는 맨 끝 스팟이 비어 있는 걸 보고 ‘기회다’ 싶었다. 내 옆에는 단 한 분만 앉을 수 있는, 나름 프라이빗한 자리였다. (다만 팬분들은 주의하시길. 연주가의 옆모습은 물론 앞모습도 잘 안 보인다!)


언제 또 이런 자리에서 공연을 보겠는가. 게다가 여기라면 예쁜 뒷모습 사진이 잘 나올 것 같았다. 에디터가 된 뒤로 느낀 건데, 사진도 글도 그림도 조금씩 늘긴 하는 것 같…?


실내악 공연, 특히 예술의전당을 자주 드나들다 보니 이제는 공연장으로 향하는 길 자체가 막 두근거리진 않는다. 그렇다고 설레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다만 무대 위에 동그란 불빛 영역이 넓혀지는 순간으로 설렘이 미뤄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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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사실 그날, 27일의 무대에는 공연 시작 전부터 낯선 장면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무대 위에 빛줄기 하나가 이미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피아노 독주회에선 원래 그런가?)


그 빛의 대각선 아래, 피아노 한 대가 홀연히 놓여 있었다. 어, 뭐지. 두 존재가 그저 함께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주는 분위기에 약간 놀라,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쏠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 차분함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번 공연은 예습도 거의 하지 않고 갔기에, ‘오늘 레퍼토리는 어떠려나?’ 하는 막연한 기대만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 순간까지는 ‘그냥 즐겁게 듣다 가자’는 마음뿐이었다.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오늘의 좌석을 누리며, 편안히 연주자를 기다리면서.




2.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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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14시가 되자 관객석 위로 조명이 내려앉았다. 무대 오른편 문이 열리며 오늘의 피아니스트가 중앙으로 타박타박 걸어 나왔다. 그 순간 나는 조금 당황했다. 표정도 걸음도,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 눈에는 뭔가 말을 덧붙이기 어려운 기색을 지닌 사람이 서 있는 듯 보였다. 물론 연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무대 앞에서는 원래 이렇게까지 차분한 모습이구나 싶었다. 내려앉은 어깨선과 담담한 표정이 특히 오래 기억에 남는 건, 공연 전 무대 위에 홀로 드리워져 있던 빛줄기의 기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를 보면서 나는 왠지 함부로 웃으며 반길 수 없었다. 오히려 시선을 내려놓은 채 ‘오셨구나’ 하고 조용히 맞이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 두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랄까.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감각일 뿐이었다. 그는 익숙한 듯, 머뭇거림 하나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아 두 손으로 바흐를 내려두기 시작했다.

 

 

바흐: 코랄 전주곡 (부조니 편곡)

바흐의 코랄 전주곡 두 곡은 원래 교회 예배용 오르간 곡이고, 부조니가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해 무대에서 자주 연주된다.


— 제2번 「눈을 떠라, 우리를 부르는 소리」, BWV 645

첫음이 번져 나간다. 욕심 없이 내려놓은 소리다. 판단이나 색채를 묻지 않는 울림이 전해진다.


바흐의 곡은 늘 하늘을 향해 노래하며, 특히나 그 갈래가 여러 방향으로 쏘아 올리는 느낌을 줄곧 받아왔었는데 오늘은 피아노 한 대의 소리가 빛줄기 속에서 조명 쪽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돌아올 답이 없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벽을 두드리는 옆뼘의 손만 같다.


— 제8번 「당신 안에 기쁨이 있나이다」, BWV 615

소리가 화려해졌는데, 슬프게 들린다. 아, 그 어깨선 때문일까. 곧 귀가 쨍할 만큼 다채로운 화음이 몰려오는데, 아까 혼자 있던 이는 어디로 간 걸까. 한 사람이 치는 게 맞나 싶을 만큼 여러 갈래가 동시에 춤춘다. 소리가 쏟아져 나오니 말릴 수 없다. 급한 걸음처럼 훌쩍 떠나버린 사람만 같다.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 b단조 Op.58

쇼팽 소나타 3번은 조르주 상드와 함께 지내던 시기의 작품으로, 쇼팽이 남긴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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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I. Allegro maestoso — 당당하고 장엄하게

아주 미묘하게, 관객을 살짝 앞질러 간다. 설득하기보다 제 길을 보여주는 사람 같다. 그러고 보니 쇼팽의 협주곡은 들어봤어도, 소나타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음표가 검붉은 세련됨을 지닌 채 구슬처럼 떼르르 흘러내린다. 저 손 아래에서 쇼팽이 누구인지 추측해보는 재미가 있다. 김도현의 1악장은 당당하다기보다 담담하고 존엄하다.


고귀한 길을 거닐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소탈하다. 능숙하게 흐르면서도 기교를 내세우지 않는다. 쇼팽이 예쁜 구슬을 들고 유순한 춤을 춘다. 감정은 짙지만, 피아니스트의 밤기운이 덮여 균형이 맞는다. 조금만 끼를 부려도 과할 텐데, 오히려 방울방울 소리를 살려 조화롭게 노닌다. 귀로, 또 눈으로 안정적으로 ‘쇼팽’을 느낄 수 있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에서 느낄 수 있는 익숙한 소리 패턴도 들린다. 연주가가 어떻게 다뤄냈던가? 아주 깨끗하게 올려놓는다. 


그에게 있어 피아노는 친구라기보다 동반자 같다. 건반이 이렇게 무겁지 않게 들리는데, 밀도 높은 감정이 숨어 있을 수 있구나.


피아니스트마다 이렇게 소리가 다를 수 있구나. 생각보다 강하게 휘어잡아주니 집중도가 올라간다. 연주가 스스로 길을 찾아 흐르니, 듣는 이도 마음이 편하다.


불순물이 낄 틈이 없다. 애초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 버리니 끼어들 수도 없다. 소나타는 늘 돌아오는 구간이 있는데 아까는 분명 서사적이었으나 이번엔 호흡이 보다 가득하다. 마지막은 어떻던가? 그저 은근히—툭. 놓고, 기다렸다 떠난다.


II. Scherzo: Molto vivace — 매우 생기 있게

연주하는 손이 깃털처럼 가볍진 않은데, 들려오는 건 솜사탕 같다. 모양은 단단한데 소리는 무척이나 가볍다. 무게를 절묘하게 덜어져 있다. 이쯤되면 그가 피아노와 얼마나 대화를 나눈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둘이서 노는 광경을 보다보니 내가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게 없다. 


III. Largo — 느리고 폭넓게

봐, 탕탕— 막 던지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애지중지하지도 않는다. 

 

서정적인 바람을 불러올 땐 세상 무표정한데 어깨를 툭툭 두드리듯 위로한다. 평화로운 초원이 펼쳐진다. 안식의 길일까. 피아노가 이렇게 외로워 보이긴 처음이다. 혼자 두어야 할 것 같은데, 소리의 윤이 심상치 않다. 이 말이 위안이나 될까. 모르겠다.


IV. Finale: Presto non tanto — 매우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소리의 채도를 짙게 가져가지만,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말똥거리지만 쾌활하지는 않다. 서정적인 전쟁 소나타일까, 피아노 한 대의 목소리일까. 이렇게 짜낸 쇼팽이 대단하다. 사랑이란 게 뭘까 싶다. 춤을 이토록 치밀하게 추는데, 코어가 이렇게 단단하다니. 관상엔 춤이 없는데, 엄청난 댄싱을 보여주는 사람만 같은...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0번 C장조 K. 330

K. 330~332 묶음 가운데 하나로, 교육과 연주를 겸해 쓰인 전형적인 3악장 소나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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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I. Allegro moderato — 보통 빠르게, 경쾌하게

그냥 맑다. 건반이 청정수처럼 맑아, 소리가 동그랗게 튀어 오른다. 그 구슬로 다이아를 만든 듯 귀하다. 힘을 빼는 듯한데 힘이 없는 건 아니다. 날다람쥐처럼 뛰는데, 와중에 실로폰 같은 울림이 난다. 암반수로 만든 타종 같다.


연주자는 능숙하지만 기계적이지 않다. 사람다운 자유분방함이 배어 있어 더 신기하다. 듣기 좋다. ‘나도 해 보고 싶다’ 생각이 들지만 내가 손을 얹어도 이 생에는 절대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어려운 선택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잘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가도, 피아노가 매우 ‘피아노’다운 소리를 흘려내니 ”난 그냥 시냇물을 그리라해서 시냇물을 똑같이 그린 것 뿐이야” 하는 사람 같다.


한 번씩 돌아오는 상승의 소리가 간드러지다. 모차르트로 랩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엔 어떻게 가라앉으려나? 툭, 놓지만 소리를 던지지는 않는구나. 알다가도 모를 사람.

 

II. Andante cantabile — 노래하듯이, 느리게


노래하듯이? 아니 더 담백하게, 독백을 하며. 느리게? 이 말보다 더 소리를 떨어뜨려 놓은 뒤 사유할 틈을 남겨가며. 

 

음과 음 사이 간격을 이렇게 세밀하게 조절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모차르트처럼’ 흘러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지식이 부족하니 계속 추측만 하게 된다. 


III. Allegretto — 조금 빠르게

조금 빠르고 다정하다. 아까의 쇼팽보다 훨씬 정이 들어 있다. 명랑한 무언가가 귓속말하듯 다가온다. 나긋함을 더해도 좋겠다. 성숙한 소리가 밑바탕이지만 빛자락도 몇 방울쯤 더 넣고 싶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게, 씩씩할 수 있도록.


뭔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중간 정도를 들으면서 느꼈던 감정이 순간순간 스쳤다. 곡은 다르지만 ‘나를 원상태로 돌려보내 주려는 기운’이 닮았다. 반복 구절이 후반으로 갈수록 밝아져서일까. 소리가 갔다가 돌아오고, 또 갔다가 돌아온다. 


모차르트는 원래 이런 사람일까? 왔다 갔다 하는데도 주의가 끝까지 따라간다. 관객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7번 B♭장조 Op.83

프로코피예프 7번은 ‘전쟁 소나타’(6·7·8번) 중 하나. 거친 리듬과 강한 대비가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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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단단히 박아가면서도, 불편하고 위험한 춤을 춘다. 피아노는 이렇게 걷는구나. 정말 '발걸음' 같다. 곡예도, 이명도 아닌, 비틀거리는 발걸음. 오른손이랑 왼손이 확실히 갈라져서, 혼자 치는데 두 명의 이중주 같다. 


바이올린 소나타에서도 막 위태롭게 삐걱거리다가 갑자기 서정적인 멜로디를 불러와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피아노 곡에서도 그러는구나. 


왼손은 땅을 치고, 오른손은 별을 박는다. 사뿐히 내려놓는 길은 모차르트에서 이미 끝난 모양이다. 언제 폭풍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아래쪽 기운을 확 끌어올린다. 혼을 빼놓는다기보다, 숨 쉴 틈을 안 준다. 양손이 번갈아 사람을 휘감아 놓는다. 애태우는 건 아닌데, 정신 차리라고 맴도는 기세겠다.


프로코피예프는 예외가 없다. 피아노든 바이올린이든 봐주는 게 없다. 다만, 대미 장식하기엔 이만큼 좋은 레퍼토리가 또 있을까?

 

 

앙코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2번 K. 332 — II. Adagio

모차르트 소나타 12번 2악장 Adagio는 오페라 작곡의 감각이 스민 느린 노래 악장. 아리아 같은 선율이 중심이다.


첫 소절에 ‘아, 이거 들어봤는데’ 싶었다. 역시, 맨 처음 북살롱에서 연주해 주셨던 곡. 그때보다 초연한 기운이 덜해 오히려 더 편하게 들린다. 지난 5월이 떠올라 괜히 기분이 환해졌다. 무엇보다 내 옆 관객분. 엄—청 행복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고 계신 게 다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따라 나왔다. 음, 즐거운 토요일이다.

 

 


3.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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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최근 들어 이날만큼 멍하니 바라본 공연도 드물었다. 무엇보다 연주자가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지 않은가. 왼편 구석 자리에서 정면을 마주하면, 무대 위 빛웅덩이와 빈 자리만 가득하다.


한 시간 넘게 누군가의 뒷모습만 바라본 것도 처음이었다. 표정도 알 수 없고, 시선도 알 수 없고, 남는 건 건반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가 떨어지는 손 모양과 뒷자락뿐이었다.


그는 피아노 위에 눌러앉기보다, 어깨에 손 얹듯 다정히 건반을 만졌다. 손가락을 길게 뻗기도 하고, 아주 작은 공백을 남기기도 했다. 힘이 크게 들어가는 것 같지 않은데도 건반은 강하게도, 또 약하게도 울렸다. 음악을 애초에 안 하고는 못 사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굳이 애써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시야가 가벼우니 들려오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편안한 주말, 건반이 말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했다. 봐야 할 것에서 자유로워지면, 무대의 주인공 말고도 볼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난다. 같은 열에 앉은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살짝 담았다.


피아니스트 김도현은 ‘거대한 사랑둥이’가 분명하다. 그는 알까. 객석에서 그를 향해 쏟아지는 빛이 얼마나 많은지. 맨 앞, 그것도 끝자리에 앉으면 이런 게 좋다. 나를 제외한 타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공연을 응시하고 있는지 살짝 엿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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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열은 어땠던가. 누구는 두 손을 모아 경건히 앉아 있었고, 누구는 눈을 감은 채 소리에 깊이 잠겨 있었다. 얼마나 바른 자세로 연주자를 염원하고 있었는지, 그 마음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사실 오늘의 피아니스트 연주를 자주 접할 기회가 없지 않았는가. 그래서 무대 위에서 주로 어떤 모습인지, 어떤 마음으로 오르시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이렇게 큰 사랑이 그의 앞에 길게 이어졌으니, 그만큼의 행복을 체감하고 계신지 묻고 싶어졌다. 저만큼이나 두 손 모아 듣고, 긴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바로 앞에 있으니.

 

아, 기차에서 묵은 여독이 살짝 풀리는 게 느껴졌다. 사랑둥이를 감싸는 온기 속에서 호사를 누린 것 아니던가. 언제 또 장인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들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나만의 ‘방과후 교생쌤’ 같은 연주자를 이렇게 좋은 무대에서 다시 만나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다만 가라앉은 어깨가 눈에 밟혀, 착각 같은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별일 없으시죠?


그냥 묻는 말이니 신경 쓰지 마시라. 혹여 고단한 일이 있으시다면, 동반자인 피아노와 함께 재미있게 놀면서 풀어내시겠지.

 

갑자기 웬 안부냐고? 그냥, 자꾸 이 물음이 떠올랐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큰일이 없어도, 아무 일 없어도, 서로 굳이 안부를 묻고 관심을 가져주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나를 신경 써줄 ‘선생님’ 하나 찾기 어려운 세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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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그쵸, 선생님? 

늘 그렇듯 안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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