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이아트뮤지엄을 특히 좋아한다. 대규모 기획전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유명 미술관과 협업하여 실제 원화를 국내에 들여오는 전시를 자주 선보이기 때문이다. ‘복제’가 아닌 ‘실물’을 본다는 감각은 어떤 도록이나 스크린 속 이미지로는 도저히 충족되지 않는다. 유화의 질감, 화가의 붓질, 파스텔의 번짐, 종이 위 연필 선의 강약까지도 오롯이 느낄 수 있기에, 매번 전시를 보러 갈 때마다 기대감이 크다. 이번 ‘이탈리아 국립 카포디몬테 19세기 컬렉션: 나폴리를 거닐다’ 역시 그러한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포맷변환]etet[크기]최종_국문포스터.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8/20250823215257_tpdsweet.jpg)
카포디몬테 미술관은 이탈리아 남부 최대 규모의 국립 미술관으로, 르네상스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약 47,000점에 달하는 방대한 소장품을 자랑한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같은 거장들의 작품은 물론, 앤디 워홀과 조셉 코수스 같은 현대미술 작가의 작업까지 아우르며 고전과 현대를 잇는다. 그중에서도 19세기 나폴리의 격동과 변화를 담은 회화 74점이 서울 삼성역 인근 마이아트뮤지엄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관람은 특별한 경험이 된다.
이번 전시는 총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1부 ‘Female Images. 그녀들을 마주하다’, 2부 ‘Interiors. 각자의 방, 각자의 세계’, 3부 ‘Gioacchino Toma, evoking the state of mind. 토마의 시선’, 4부 ‘Exteriors. 빛이 있었고, 삶이 있던 곳’. 각각은 19세기 나폴리 사회가 품은 가치와 이상, 개인의 감정과 공동체의 삶을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전시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섹션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19세기는 나폴리가 군주제에서 통일국가로 전환되는 격동의 시기였다. 이 변화 속에서 여성상을 다룬 작품들이 눈에 띈다. 귀족 여성의 화려한 초상은 권력과 위엄을 담아내지만, 서민 여성의 초상은 강인함과 주체적인 삶의 기운을 전한다. 서로 다른 계급과 삶의 궤적 속에서도 ‘여성’이라는 공통된 주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한 공간 안에서 비교하며 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모세 비앙키의 ‘공포’는 특히 강렬했다. 화면을 가득 메운 거대한 구름 같은 존재가 모녀를 낭떠러지로 몰아내는 듯한 장면은, 단순한 장식적 초상을 넘어선 사회적 불안과 시대적 긴장을 압축한다. 거친 붓질과 몽롱한 색감은 실체 없는 두려움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며, 보는 이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또한 오리엔탈리즘적 상상력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빈첸초 부시올라노의 ‘가엾은 사포’는 고대 그리스 여류 시인 사포를 소재로 삼아 비극적 감정을 극대화했고, 안드레아 페트로니의 ‘여인상 / 원해요!’는 동양적 분위기를 빌려 상상 속 장면을 그려냈다. 동시대 프랑스 낭만주의나 인상주의와는 다른 색감과 서정이 담겨 있어, 당시 유럽 화가들이 가진 동경과 환상을 엿볼 수 있었다.
중반부에는 조반니 볼디니의 ‘공원 산책’ 같은 작품도 만날 수 있다. 파리 사교계를 배경으로 활동하며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명성을 떨친 볼디니의 작품은, 전시 전체의 맥락 속에서 또 다른 대비를 만들어낸다. 나폴리 화가들의 사실적이고 때로는 거친 시선과 달리, 세련되고 유려한 붓질 속에서 벨 에포크 시대의 화려함이 드러난다.
![[포맷변환]etet[크기]KakaoTalk_20250823_214830310.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8/20250823215313_suqxidus.jpg)
후반부로 갈수록 풍경화가 중심이 된다. 나폴리와 지중해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화창한 바다와 햇살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당시 화가들이 이상화된 풍경 대신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안토니노 레토의 ‘배와 거리의 아이들’은 해변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처럼 생생하게 전해주었고, 빈첸초 카프릴레의 ‘해변에서’는 소박하고 따뜻한 나폴리의 일상을 그려내어 한동안 시선을 머무르게 했다.
이처럼 이번 전시는 개인의 초상과 방, 심리적 풍경에서 시작해 결국 남부 이탈리아의 빛과 삶으로 확장되는 여정을 보여준다. 한 사람의 얼굴에서, 혹은 한 아이의 웃음에서 그 시대의 사회적 긴장과 변화가 읽힌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Vedi Napoli e poi muori.”라는 괴테의 말은 단순히 도시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문장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예술적·사회적 풍경의 총체적 매혹을 드러낸 표현일 것이다. 비록 우리는 19세기의 나폴리를 직접 걸어볼 수 없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화폭에 담긴 햇살과 바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마이아트뮤지엄이 늘 그랬듯, 이번 전시는 관람자에게 ‘도심 속 여행’의 기회를 선물한다. 복잡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그림 앞에 서서 19세기의 나폴리를 거닐 듯 마음을 맡기는 경험. 그것이야말로 전시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