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함은 나의 힘
![[크기변환]press_20_012.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12005212_elzummch.jpg)
소설을 공부하던 학부 시절에 인상 깊게 들었던 교수님의 말씀이 있다. 이상할 거면 확실히 이상해라. 어설프게 이상하면 지적을 받지만, 끝까지 밀어붙이면 누구든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그 말인즉슨 어떤 특징이든 그것을 장악할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이 뒷받침되면 결점이 아니라 정체성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쓰는 소설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기에 창작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창작을 그만둔 지금에도 그때 배웠던 것들은 작품을 감상할 때 무척 유용한 관점을 제공할 때가 많다.
‘이상해도 괜찮아(Stay Strange)’라는 슬로건 아래 매년 독특하고 실험적인 매력의 영화들을 선보이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는 올해로 29주년을 맞이했다. 7월 3일부터 13일까지 개최된 제2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이번에도 다채롭고 개성 있는 작품들을 발굴해 소개하는 한편 AI 및 VR, XR 등을 접목한 다양한 콘텐츠들에 힘을 실으며 미래 지향적 세계관을 구축했다.
나는 7월 8일, 9일, 10일 사흘에 걸쳐 부천에서 총 6편의 영화들을 만나고 왔다. 영상 관련 교육 기관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미래구역 배지 혜택으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혜택이 없더라도 전혀 후회하지 않았을 만큼 값진 경험이었다. 무더위가 정점을 찍는 동안 등허리에 줄줄 흘러내리는 땀조차 낭만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어딘가 이상하고 별난 매력을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로 기세 좋게 장악해 버린 작품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 가운데 4편을 짧게 소개하고자 한다.
<사랑의 노래를 불러줘> - 알렉시스 랑글루아
미미와 빌리는 스타 오디션 프로그램 대기실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환상의 콤비를 자랑한다. 하지만 미미가 프로그램에서 최종 우승을 거두고 세계적인 아이돌 스타로 거듭나면서 둘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반항적인 펑크 록을 추구하는 퀴어 뮤지션 빌리에게 미미의 대중적인 노래와 춤은 못마땅할 뿐이다. 결국 미미가 이별을 고하자, 미미의 유명세로 인해 줄곧 소외감을 느끼던 빌리는 복수를 결심한다.
이번에 내가 관람한 영화들 가운데 가장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다운 작품을 꼽자면 이것이다. 오늘날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용어인 ‘퀴어(queer)’는 원래 ‘이상한’, 혹은 ‘기묘한’을 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 퀴어는 ‘이상해도 괜찮아’라는 슬로건과 가장 잘 어울리는 소재다.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을수록 개성을 잃어버리는 미미의 모습은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정상성에 대한 감독의 비판적 시선을 보여준다. 연극적이고 과장된 연출과 충만한 B급 감성 역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걸맞은 요소다. 원초적이고 화려한 색감과 강렬한 사운드가 어우러져 마치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는 듯하다. 사건과 맞물려 뮤지컬의 넘버처럼 등장하는 노래들이 무척 중독성 있고 매력적이라 즐거웠다.
<하늘나라로 가요> – 알베르토 샴마
볼리비아 사막에 사는 여덟 살 소녀 산타는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어머니를 구출하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호수의 물고기를 삼킨 그녀는 늙은 신부에게 트럭을 빌려 하늘나라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트럭이 고장 나버려 길을 잃은 산타를 라 레이나가 데려와 여성 레슬러들의 버스에 태워준다. 여행 도중 불의의 사고로 경찰서에 가게 된 산타는 아내를 잃은 경찰서장 구스타보를 만나 특별한 연을 맺는다.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영상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GV에서 들은 바로는 볼리비아의 정수가 담긴 유명한 장소들에서 촬영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신비로운 사건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며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한다. 어린 소녀의 때 묻지 않은 시선은 그로테스크한 연출과 맞물려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물고기, 콘도르, 춤과 같은 상징적 소재는 여러 번 그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전체적으로 논리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는 시 같은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다. 난해함을 난해한 채 남겨두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주인공 산타를 연기한 페르난다 구티에레즈 아란다의 멋진 연기력 또한 인상적이었다.
<잠자는 바보> – 사카모토 유고
유미와 루카는 대학 선후배이자 룸메이트다. 무기력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유미와 달리 루카는 밴드 보컬로서 자신만의 꿈을 향해 열정적으로 달려나간다. 둘은 서로 다른 삶의 리듬을 함께하면서 절친한 사이가 된다. 어느 날 우연히 루카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독보적인 카리스마로 온 무대를 장악하는 루카의 색다른 모습을 본 유미는 충격을 받는다.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던 타구치가 루카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뒤 유미는 루카와 대조되는 자신의 모습에 더욱 실망하게 된다. 음악계에서 점차 주목받던 루카가 대형 음반사에 스카우트되자 둘의 관계는 본격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영화인데 만족스럽다. 발랄한 유머와 함께 잔잔하게 일상이 흘러가면서도 주제 의식은 꽤 날카롭다. 뚜렷한 목표나 야망 없이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일본 청년 세대의 분위기가 반영된 듯하다. ‘청춘’ 하면 떠오르는 빛나는 이미지는 루카와 같은 소수의 사람에 한정되고 망망대해 같은 삶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유미는 평범한 청춘의 대표처럼 보인다. 절친한 두 여성 가운데 한 명이 스타로 데뷔하면서 갈등이 시작되는 구도는 위에서 소개한 <사랑의 노래를 불러 줘>와 비슷하다. 유명해질수록 본래의 빛나는 개성을 잃어버리는 상황 역시 유사한데, 진부한 듯한 주제 의식을 임팩트 있는 결말을 통해 감동적으로 풀어낸다고 느꼈다.
<너와 나의 우주> – 파블로 오스트리코브
목성의 위성 칼리스토로 핵폐기물을 실어 나르는 우크라이나인 운전사 안드리 멜니크는 운행 도중 지구가 폭발하면서 갑작스럽게 인류 최후의 생존자가 되고 만다. 인공 지능 로봇 막심과 함께 애써 태연하게 남은 일상을 보내던 안드리는 어느 날 또 다른 생존자에게 무전을 받는다. 그녀는 토성의 우주 정거장에 있는 프랑스인 여성 카트린이었다.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연심을 품게 된 안드리는 좌절에 빠진 그녀를 돕기 위해 막심의 반대를 무릅쓰고 토성을 찾아가기로 한다.
나의 2025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베스트픽이다. 큰 기대 없이 보러 갔다가 마치 서프라이즈 선물을 받은 듯한 행복을 느꼈다. 우주선과 인공 지능이 등장하는 미래적인 배경에서 들려오는 고전적인 메시지에 아이러니한 매력이 있다. SF나 재난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스펙터클보다는 인물의 감정과 심리에 집중해 철학적인 주제를 섬세하면서도 유쾌하게 풀어내는 힘이 돋보인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광활한 우주를 그리는 영상미도 눈에 띈다. 무엇보다도 후반부의 반전과 결말의 아름다움에는 정말이지 온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모두를 위한 영화제
2025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한여름의 열기가 남기고 간 잔상처럼 지금도 내 곁에 머무르고 있다. 최근에 자주 떠올랐던 개인적인 고민을 스크린을 통해 다시금 마주한 것 같아 더욱 뜻깊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전공을 현대문학에서 문화콘텐츠로 바꾼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마다 긴 설명이 번거로워 ‘문학은 돈이 안 되니까’라고 답하곤 한다. 확실히 문화콘텐츠는 문학보다 대중적인 전공이다. 하지만 대학원생은 스페셜리스트의 길을 걷는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모두 이상한 사람들이다.
내가 만난 부천에서 만난 영화들은 이상하게 말하거나, 이상함을 말하거나, 이상함을 이상하게 말하는 이야기였다. 어딜 가나 이상한 것은 있다. 그것을 다르게 말하면 누구나 한두 군데는 이상하다는 뜻이 된다. 성격, 외모, 지능, 재산, 건강 등 개인의 모든 특성이 정확히 평균에 해당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따라서 이상함은 소수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사실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함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다른 이상함을 헤아릴 수 있다. 우리가 모두 평범하다면 이상한 이야기는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듯 많은 사람이 매년 이곳을 찾아오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