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20대 초반,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백화점을 구경한 적이 있다. 겨우 파트 타임 알바를 하던 대학생인 친구의 지갑에 여유가 있을 리 없었지만, 그녀는 마치 금방이라도 물건을 살 것처럼 직원에게 가격을 물었고, 새침한 표정으로 능숙하게 백화점 안을 거닐었다. 방금 전까지 카페에서 편하게 대화를 나누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기에 나는 그녀의 연출된 우아함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여유로운 척, 그 공간에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이고자 했던 친구의 연출은 실은 그 안에 속하지 못한다는 불안의 방증이었을 것이다. 무언의 위계는 종종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게 하고, 그러한 과장은 실체와의 간극을 더 또렷하게 조명한다는 점에서 묘한 민망함을 남긴다.
아무튼 그때 친구의 태도 너머로 난, 백화점이라는 공간이 단순히 비싼 잡화를 파는 곳이 아니라, 삶의 고급스러운 매끈한 태도 따위를 전시하고 소비하는 편집숍이란 걸 명확히 알게 됐다. 그리고 그 편집엔 언제나 조용한 배제와 은근한 박탈이 뒤따른다는 것도.
이번 Art of Luxury 전시를 보겠다고 나선 건 무언가를 배제함으로 완성되는 ‘럭셔리’에 대한 나의 반감을 들여다보고 싶어서였다.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의 이름이 걸려 있었지만, 설레는 마음보단 비뚤어진 마음으로 전시장에 들어섰다.
전시
[“럭셔리는 풍요를 뜻하는 라틴어 럭셔스(Luxus)에서 파생되어 17세기 이후 사치를 의미하였습니다. 오늘날 럭셔리는 호화로운 사치품이자 뜻밖의 호사를 말하며, 명품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고급진 외면의 물질성과 더불어 시간이나 경험과 같은 희소성을 지닌 가치까지 그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 Art Of Luxury 전시 서문 中
관람객 대부분이 감으로는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럭셔리’라는 개념을 정리하며 시작하는 이번 전시는, 총 4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질적인 럭셔리를 의미하는 Material Luxury, 브랜드를 중심으로 풀어낸 Inspiring Luxury에 이어 럭셔리의 정신적 특성을 담은 Spiritual Luxury, 지나온 시간의 가치를 강조하는 Timeless Luxury까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급스러움'의 정체를 해부하겠다는 기획이다.
전시 전반부, Material Luxury & Inspiring Luxury - Material Luxury 섹션에는 쿠사마 야요이, 앤디 워홀 등 강렬한 이미지의 작품들이, Inspiring Luxury 섹션에는 ‘명품’이라 불리는 브랜드 제품들이 럭셔리의 상징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이들 섹션에서는 전시를 감상하기 전 막연히 떠올렸던 ‘한눈에 고가임을 알아볼 수 있는 럭셔리’를 그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이 럭셔리로 불리는 건 단순히 외면적인 화려함 때문만은 아니다. 예컨대, 쿠사마 야요이의 에는 작가가 어린 시절 겪은 불안과 강박의 흔적이 담겨 있다는 비하인드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선 두 섹션은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럭셔리를 반복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매끈한 외형으로 타인을 압도하거나 배제하는 형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시 후반부, Spiritual Luxury & Timeless Luxury
[“오늘날 시간, 경험, 지식, 자유와 같은 개념의 럭셔리는 비물질적인 속성과 연결됩니다. 본 공간에서는 정신성을 표출하고 다양한 내적 탐구를 시도한 작품들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럭셔리로 인식되는 현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 Spiritual Luxury 中
반면, 전시 후반부의 Spiritual Luxury와 Timeless Luxury 섹션을 지나며 기존 럭셔리에 대한 인식도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두 섹션은 김환기, 이우환, 박서보의 작품들과 조선백자 등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로서의 럭셔리를 다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건 단연 조선백자다. 눈에 띄는 장식 없이 절제되고 고요한 형태로도 충분히 고유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럭셔리의 속성을, 조선백자는 증명하고 있는 듯했다.
조선백자에서 럭셔리를 감각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전시 공간의 연출 방식’이었다. 다른 작품들이 비교적 촘촘하게 전시된 것과 달리, 백자는 전시 후반부의 정점처럼 상대적으로 넓은 공간 한가운데 단독으로 놓여 있었는데, 서울에서 월세 60만 원을 감당하며 비좁은 자취방에서 살아본 내겐 단 하나의 오브제를 위해 이토록 넉넉한 공간이 허락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여유이자, 사치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 경험은 외형이나 가격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공간과 배치, 그리고 시간이 만든 역사 속에서도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는 ‘럭셔리’의 다층적인 면모를 확인하게 했다.
나가며
럭셔리는 반드시 배타성을 전제로 한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의 한 기사에 따르면, 소수에게만 접근을 허용해야 비로소 럭셔리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명품은 생활용품을 만들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럭셔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내가 럭셔리 앞에서 느끼는 위화감이나 긴장감 같은 것들은, 그 개념이 사람을 구분하고 배제하는 구조로부터 시작된다는 걸 인식한 데서 비롯된 본능적 거부 반응이었을 테다.
20대 초반, 친구가 백화점에서 위축된 자신을 감추기 위해 능숙함을 연기했듯, 나 역시 위계를 느끼게 하는 곤란한 상황 앞에서 무심한 척, 일정한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방어해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태도가 더 나은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여전히 경계를 그으며 누군가를 도려내는, 그래서 불편하지만 자꾸 의식하게 되는, 재수 없고 흥미로운 '럭셔리'라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번 전시는 내게 ‘선망하지만 속하기 어려운’ 세계가 무엇인지 되묻게 했다. 시선을 끌고 욕망을 자극하지만, 쉽사리 손에 쥐어지지 않는 장면들. 럭셔리라 불리는 것들은 대부분 그 경계 어딘가에서 우리의 결핍을 얄밉게 간지럽히고 있다.
[“사람마다 럭셔리를 각각 다르게 정의한다. 즉 럭셔리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예를 들어 인도인들에게 럭셔리가 뭐냐고 물으면 절반 정도는 ‘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한마디로 ‘당신이 꿈꾸는 것’을 럭셔리라고 볼 수 있다”] - 동아비즈니스리뷰 기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