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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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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여름, 작은 시골 마을로 이사 온 13살 ‘석영’은 12살 ‘우주’를 만난다. 석영은 바다에 빠질 뻔한 자신을 구해준 우주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두 사람은 수영을 매개로 점점 가까워지고, 우주는 석영에게 자신의 발에 물갈퀴가 있다는 비밀을 들려준다. 둘만의 비밀 덕분에 우정은 갈수록 두터워진다. 그러나 물갈퀴가 있는 우주가 수영에 남다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며 관계는 변화한다. 자신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일찌감치 수영을 포기한 석영과, 수영 선수가 되기 위해 마을을 떠나는 우주는 그렇게 헤어지게 된다.

 

2013년 여름, 석영과 우주는 재회한다. 여전히 시골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석영은 체육 고등학교가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수능을 준비하며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는 중에도, 아침마다 수영 선수가 된 우주의 소식을 찾아보는 일은 결코 빼먹지 않는다. 온갖 상과 기록을 휩쓸던 우주는 어느 순간 물갈퀴가 희미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실력은 평범해지기 시작하고, 슬럼프가 그를 덮친다. 우주는 잠시 수영장을 떠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로 돌아오고 물갈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석영을 찾아간다. 6년 만의 재회는 서로에게 큰 감정의 파동을 불러일으키고, 이내 두 사람만이 공유하고 있던 비밀이 관계에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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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 인 더 풀>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소재는 단연 우주의 물갈퀴다.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자리한 물갈퀴는 인간에게 없는 신체적 특징이다. 현실의 인간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판타지적 요소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우주의 어린 시절을 따라가며 각자의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물갈퀴로 인한 우주의 혼란스러움에 온전히 이입할 수 있는 이유는, 물갈퀴라는 소재 자체보다 어릴 적의 보편적인 감정을 담아내는 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비밀과 그 비밀이 밖으로 드러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불안감. 남들보다 뒤처지는 재능과 실력에서 비롯되는 열등감. 두 개의 감정을 핵심 축으로 삼아 어린 시절의 내밀한 속마음을 찬찬히 살핀다.

 

누구나 어릴 적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비밀을 하나씩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우주와 석영 역시 외부에 드러내지 않는 내밀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주의 비밀은 물갈퀴다. 물을, 바다를, 수영을 무엇보다 좋아하지만 늘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두꺼운 양말을 신은 채 수영장에 들어간다. 타인과 다른 신체적 특징으로 인해 속한 곳에서 소외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자신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우주의 비밀을 갈수록 두텁게 만든다.

 

석영도 불안을 느낀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작은 마을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는 두려움과, 다니던 학교와 절친한 친구들에게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이다. 부모님은 어린 석영과 석영의 동생에게 집안 사정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지만, 가정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복잡한 상황과 걱정스러운 마음을 품은 석영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물이 있는 장소다. 물속에 있으면 자유로워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영에 자신이 있으니까 자연스레 바다와 수영장을 찾게 된다. 이내 그곳에서 우주를 만난다.

 

기댈 곳 없던 두 사람에게 처음으로 서로의 비밀과 속마음을 공유한 상대가 생긴다. 우주에게 석영은 나의 물갈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석영에게 우주는 오직 나에게만 소중한 비밀을 공유해 준 사람이다. 남들은 모르는 비밀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둘 사이에는 특별한 우정이 싹튼다. 서로의 존재 하나로 하루하루가 즐거워지던 시간들과, 바다와 수영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 놓고 티격태격하던 순간들이 모여 둘만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나마 불안감을 잊고 ‘평생 같이 수영하자’는 사랑스러운 약속이자 다짐을 나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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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열등감이라는 감정은 그 어떤 감정보다도 지독하다. 석영은 우주와 함께 수영할수록 그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여태껏 석영의 세계에는 수영으로 자신을 이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 대회에서 여러 번 수상하고 주변의 인정도 받아오며, 누구보다 수영을 잘할 자신이 있었고 앞으로도 수영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부드럽고 힘찬 몸짓으로 물속을 유영하며 앞서 나가는 우주의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 큰 충격을 받는다. ‘저게 재능이라는 것이구나’, ‘타고난 것은 이길 수 없구나’라는 충격과 함께 난생처음 겪어보는 수준의 거대한 열등감이 석영을 덮친다. 차원이 다른 우주의 재능을 목격한 후, 석영의 세계는 거세게 흔들린다.

 

석영은 수영을 일찌감치 포기하게 된다. 우주에게는 애써 웃는 얼굴로 ‘꼭 수영 선수가 돼’라고 말하지만 사실 속은 문드러지는 중이다. 일찍이 수영 코치의 눈에 들어 체육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 우주와 달리, 석영은 제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을 느낀다. 수영장 레인에서 우주가 지나간 빈자리를 바라보는 석영의 얼굴에 그를 향한 애정, 동경, 그리고 열등감이 동시에 비친다. 우주는 수영을 계속하려 홀로 서울로 떠나고,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게 된다.

 

반면 우주에게는 수영을 계속하라는 석영의 말이 큰 응원이자 자극제로 작용한다. 남들과 다르기에 감춰야만 했던 물갈퀴가 이제는 자신을 석영에게 인정받도록 하고, 또 자신을 온전히 숨 쉴 수 있도록 한다.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수영에 각별한 애정을 느낄 뿐 아니라, 남들보다 잘하기까지 한다는 점이 그를 추동하는 원동력이 된다. 실력이 늘고 유영이 익숙해질수록 보다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열망은 커져만 간다. 석영의 응원, 열정, 승부욕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한 채 수영 선수라는 목표만을 바라보고 내달리기 시작한다.

 

이렇듯 두 사람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모든 분야에서 인정받기를 원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공부든 노래든 운동이든 남들보다 모든 것을 잘하고 싶었고, 또 잘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던 어릴 적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열등감으로 인해 좋아하던 것을 쉽게 그만두기도 하고, 외려 열등감이 강한 동기가 되어 하나에만 몰두해 보기도 했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 복잡했던 감정들과 통제할 수 없었던 마음들이 또렷하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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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 내밀한 비밀이 밖으로 드러날까 노심초사하던 불안감. 타고난 신체적 특징 때문에 속한 곳에서 배제될까 걱정하던 두려움. 치기 어린 질투와 지독한 열등감. 그리고 잘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에 느끼던 무력감까지. <보이 인 더 풀>은 불안정한 감정들과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다만 영화는 그 모든 시간을 외면하지 않고 전부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인물들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우리 모두의 고통스러운 성장을 포용한다.

 

성인이 된 석영은 다시 수영장을 찾고 우주는 아쿠아리움에서 잠수복을 입은 채 자유롭게 유영한다. 매 순간 자신을 괴롭게 하던 수많은 아픔과, 머릿속에서 지워내고 싶었던 부정적인 감정마저도 자신의 일부로 껴안고 나아가게 된 인물들의 모습에 달가움을 느낀다. 어린 시절의 우리도, 그 시절을 지나온 우리도 모두 포용하는 이야기의 다정한 기운이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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