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기억이라는 수정에 일상과는 전혀 다른 빛을 쬐는 일 같다. 수정에 새겨진 그 빛은 오래오래 들여다볼수록 새로워진다. 그 빛과 너무나 멀어져서 생경하기도 하고, 그 빛과 여전히 가까워서 놀라기도 한다.
여행 당시 호주는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이 글을 쓰는 지금 여기 한국도 여름이 되어가고 있다. 단지 시간이 흐른 것일 뿐인데, 뭐랄까 그곳의 계절을 따라잡은 기분이다.
오늘 낮에 깨어있던 사람들은 보았을 것이다. 초록 이파리와 눈부시고 따뜻한 햇살, 적당히 시원한 바람, 가벼운 옷차림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야외가 하나도 괴롭지 않은 사람들, 날씨를, 세상을 만끽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다시금 그때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그때의 빛으로.
감잡을 수 없는 시작
4박 6일 일정 중 3일차. 이젠 호주가 어떤 곳인지, 또 이번 패키지가 어떤지도 감 잡았겠다 싶은 날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여전히 패키지도, 호주도 감을 잡을 수 없었던 날이었다.
전날보단 좀 더 느지막이 준비를 마친 우리는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나 시내도 아니고 공장 단지로 향했다. 패키지에 같이 묶여 있는 일정 즉 ‘상품’을 구경하러 갈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패키지 여행엔 이렇게 상품을 구경하러 가는 시간이 있다. 그때마다 내가 여행객이 아니라 철저히 소비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지갑이 된 듯한 기분이랄까. 한껏 납작해진 기분. 입에 지폐를, 카드를 잔뜩 끼워 넣은 듯한 기분.
버스에서 가이드는 어그부츠를 아느냐고 운을 띄우고는 호주는 양이 많아서 양모가 유명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어그부츠를 겨울에 신고 다니지만 사실 여름 상품이라고. 호주는 서핑족이 많은데 그들이 서핑 후에 흡수 통풍이 잘 되는 어그부츠를 신는다고 했다.
양모 공장
우리가 간 양모 공장에서는 양모 이불을 팔고 있었다.
패키지 여행의 상품 판매 시간엔 재밌는 요소가 있다. 허가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회사 건물에서, 외국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인(혹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그 나라 사람)이 나와서 설명한다. 상하이에 갔을 당시 찻잎 추출물을 써서 비염을 치료해 준다는 코뚜레처럼 생긴 상품을 보러 갔을 때도, 게르마늄 팔찌와 목걸이를 보러 갔을 때도 다 여기가 어디지 싶은 깊숙한 곳에서 설명이 행해졌으며 한국인(혹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있었다. 그들은 삼십 분에서 한 시간가량 설명을 한 뒤, 그닥 넓지 않은 내부를 둘러보게끔 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아무것도 사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쇼룸이었다. 넓은 공간에 마치 가구점인 것처럼 침대 다섯 개가 동그랗게 배치되어 있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 직원이 나와 우리에게 침대에 편히 앉으라더니, 침대를 덮은 게 양모 이불이라며 마음껏 만져도 된다고 손짓하고는 슬슬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이런 일이 어색하고 쑥스럽다는 듯 서두를 떼더니 갑자기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굉장히 준비된 듯하면서도, 순간순간 생각해서 말하는 듯 느껴지는 말들의 향연. 그는 양모 회사 직원이라기보단 MC에 가까웠다.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투를 귀담아들으면서 그의 영업 원칙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고정관념을 부순 뒤 소비자의 감정 부추기기.
그는 고급 원단을 썼다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비싼 한국의 이불들이 사실 미세 플라스틱 덩어리라며 한국 이불 업계를 비판하고는, 이불은 패션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고정관념 부수기). 그는 이불이 건강식품이라는 가설에 맞춰 우리가 자는 동안 이불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상세하게, 과학적인 이야기도 끌고 와서 설명했다. 그러고는 지금 당신들이 덮고 자는 이불들이 당신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감정 부추기기).
그게 끝이 아니었는지 그는 가정을 이룬 여성들(우리 일행의 대부분)을 향해 남편과 자식의 건강을 물었다. 비염을 달고 사지는 않는지. 피부는 괜찮은지. 그러고는 이번 소비가 가족들의 건강을 챙기는 아내, 엄마의 이미지, 부모에게 도리를 다하는 자식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소비가 될 거라고 또 이야기를 끌고 갔다. 사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우려 섞인 어조로 은근히 경고하면서, 산다면 굉장히 만족할 거라고 소비자들이 가야 할 길을 트여주는 식이었다. 그렇게 구매 자체도 만족이 되게끔 전반적인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꾸며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호기롭게 질문을 던지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답하며 소비자들이 인터넷이나 보고 들은 것, 구매 경험을 통해 저마다 갖고 있는 확신과 의심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꺾었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지지 않는다면 누구나 홀릴 만한 말솜씨였다.
양모 이불에 콜라를 쏟아붓고 물티슈로 말끔하게 닦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그의 일장 연설은 절정에 올랐고, 사람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질 타이밍에 맞춰 뒤를 보고 한마디 외쳤다. 그러자 저 뒤쪽 문에서 한국인 직원들이 우루루 나와(나이대며 성별이며 다양했다) 한 가정당 한 명씩 붙어 상세 설명과 구매 절차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일사불란함은 겪어본 적이 없어서 매우 당황했다. 코앞까지 다가와서 무릎 꿇고 앉아 웃는 얼굴로 구매 의향을 묻는데,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아니 거절은 할 수 있더라도 일단 부담스러워 미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쇼핑의 대가인 엄마가 나서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게다가 우리에게 붙은 여성 직원이 또래인 걸 알아채고 어떻게 호주에 오게 되었냐고 화제를 돌리기까지 했다(한 수 배웠습니다. 엄마). 나는 옆에 앉아, 거칠거칠하지만 힘을 줘도 뜯기지는 않는 양모 이불을 매만지면서 직원의 짧은 가족사(딸들은 시드니 대학교를 다니고 한다는)를 듣다가 조금 아득한 생각에 빠졌다.
외지인들의 천국 혹은 지옥
호주, 하면 다들 워홀을 떠올린다. 워킹홀리데이. 돈 벌고 영어도 배우면서 외국 생활까지 해보는 일석삼조의 경험. 젊은 사람들은 많아 보이는 혜택에 홀려 워홀을 결정한다. 그러나 그런 워홀은 아주 이상적인 워홀이다. 웹툰을 거의 보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세 번이나 다시 본 웹툰 <선천적 얼간이들>에는 작가가 호주 워홀을 가서 아파트 청소일을 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내용이 하도 기상천외해 웃기면서도 한편으론 슬펐다.
픽션의 틀을 거치지 않은 현실은 어떨까. 내가 알아본 바로는, 호주 워홀 와서 카페에서 일하려면 바리스타 자격증은 물론이고 라테아트를 할 수 있어도 어렵다고 한다. 면접 기회조차 안 주는 곳이 허다하다고. 그나마 뚫기 쉬운 게 청소나 강아지 미용 같은 일들이지만 그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어디 쉬운 일인가. 도시가 아니라 농장을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농장은 대부분 외진 곳에 있고, 불법적인 노동이 알게 모르게 빈번히 이뤄진다고 한다.
게다가 내가 한식당에서 본 젊은 직원들은 전부 한국인이었다. 그들의 매니저들도 다 한국인이었다. 이상했다. 여기가 외국이 맞나. 외국에 와서 한국인 직원 밑에서 일하는 게 내가 아는 워홀이 맞나.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러고 있는 것일 테지만.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의식주도 챙겨야 한다. 그러니까 워킹홀리데이는 사실 외국인 노동자 되기인 셈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천국(호주)에서 외국인 노동자 되기. 특정 정체성이 많은 곳을 흔히 천국이라 부르는데, 실상은 지옥이라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워킹홀리데이는 누군가에겐 뜻깊은 경험으로 남을 수 있지만 누구에겐 일도 못 구하고 적응하지 못해서 돈만 쓰다가 돌아오는, 허무한 경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워홀이 유행하기 전에는 호주 이민이 붐이었다. 듣기로는 가이드도 호주로 이민 온 지 이십 년이 넘어가고 있었고, 눈앞의 직원도 그런 듯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들의 정체성은 한결 모호해진 듯했다. 자식이 번듯하게 외국 대학에 다니는데 이런 폐쇄적인 쇼룸에서 한국인 상사 밑에서 처음 보는 한국인들에게 무릎 꿇고 앉아 웃는 얼굴로 양모 이불을 설명하는 삶이란 뭘까. 이 일에 프라이드가 있을지는 몰라도, 사회생활이 대부분 그렇게 체면을 구기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건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적어도 ‘맞게 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직원은 어느새 이민자의 삶에 대한 한을 풀고 있었고, 구매로 이어지지 않은 다른 팀들도 그렇게 개개의 이야기로 화제가 바뀐 듯했다. 잠시 사라졌던 가이드가 다시 나타나 이제 시간이 됐다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관광객이 이런 상품 판매 시간에 회사 건물 밖으로 나가 있었다가 현지인과 시비가 붙어서 곤란한 적이 있었다는 얘기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두 시간가량 쇼룸에서 견디고 있었는데, 막상 그곳을 나올 때는 굉장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만나 흥미로운 대화를 나눈 거라기에도 그렇고 무언가를 제대로 구경한 것도 아닌, 애매한 경험.
이것이 패키지의 특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