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t by Yang EJ (양이제)]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16세기의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책에는 여러 명의 화자가 등장합니다. 주인공인 카라, 그의 이모부이자 카라가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인 에니시테, 그의 딸 세큐레, 카라와 세큐레의 편지를 배달해 주는 수다쟁이 에스테르, 궁중 화원 소속 화가인 나비, 황새, 올리브 그리고 그 외 시체, 죽음, 빨간 물감 등등. 생물, 무생물 할 것 없이 수많은 화자가 자신을 '나'로 지칭하며 이야기를 전개해 갑니다.
한편, 이토록 많은 화자는 모두 한 가지 동일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바로 세밀화가 살인 사건입니다. 나비, 황새, 올리브와 마찬가지로 궁중 화원 소속이었던 세밀화가 엘레강스는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살해당했고, 뒤늦게서야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정황상 범인은 궁중 화원 내부의 인물, 개중에서도 특히 술탄의 명에 따라 '밀서'를 제작하고 있던 에니시테, 카라, 나비, 황새, 올리브 다섯 중 하나일 것임을 책은 암시합니다. 이 밀서 제작은 세밀화가 사이에서도 여러 논쟁이 있을 만큼, 당시 이스탄불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모험이었습니다.
술탄의 명에 따라 제작되는 밀서에는 여러 점의 삽화가 수록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책에 실릴 삽화는 이스탄불의 전통 세밀 화풍을 배반하는 삽화입니다. 그간 이스탄불의 세밀화는 특정 인물을 모델로 하여 그림을 그리기보단, 관념 속의 사람을 그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색을 칠할 때도 실제 사물의 색으로 칠하지 않습니다. 세밀화가는 그림이 담고 있는 이야기, 의도에 어울리도록 색을 고릅니다. 그러나, 이번 밀서 속 삽화는 실재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사물과 인물을 최대한 닮게 모방하는 서양의 방식대로 그려집니다. 배경에는 원근법이 적용되며, 삽화 속 남자의 얼굴은 최대한 술탄과 닮은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밀서 제작은 화원에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킵니다.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명확한 처벌 규정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술탄과 책 제작을 총괄하는 에니시테의 지시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세밀화가는 혼란과 고통, 끔찍한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밀서를 향한 화원의 시선도 곱지 않습니다. 불법이 아님에도,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하지요. 즉, 사실적인 묘사와 원근법을 특징으로 하는 서양화법은 이스탄불 전통 회화에 도전하는 '금기'인 셈입니다. 이에 회의를 느낀 세밀화가가 자신의 동료를 직접 살해할 정도로,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습니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