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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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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이 쓴 문학작품들이 지금껏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출간된 적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 가디언

 

<고독의 이야기들>은 발터 벤야민의 이름 아래 출간된 유일한 문학작품집이다. 그가 살아 생전에 발표하지 않았던 그의 일기 속 단편 소설(노블레), 서평, 메모와 같은 글들을 엮은 것이다.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 막연히 떠오른 감상은 “벤야민이 문학 작품도 썼구나?”라는 의문 섞인 놀라움 이었다. 나는 ‘문예철학자’ 벤야민을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으로 접했다. 이 책이 출간된 지 9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아우라 Aura’ 개념은 거의 일상어로서 오늘날의 미술과 미술이 벌어지는 관념적 시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고 회자된다. 그의 ‘예술의 정치화’ 이론은 영화와 같은 기술시대의 예술이 대중의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감각을 발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본 것이다. 한때 그의 이론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반성원)을 사서 읽다, 얼마 못 가 내려놓기도 했었다. 이처럼 이론가로 정평이 난 벤야민이 한평생 문학적 글들을 써왔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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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 <내 하숙방>, 1896

 

 

부끄럽게도 몰랐지만, 벤야민은 이미 ‘재구술’을 비롯한 실험적 글쓰기로 자신의 꿈과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뛰어난 산문가였다. 이러한 사실이 그가 생전 출간하고 기고했던 문예/매체이론에 관한 논문과 비평문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도 맞다. 샘 돌베어, 에스터 레슬리, 서배스천 트루스콜라스키가 편집하여 출간한 <고독의 이야기들>은 이러한 벤야민의 실험적 문학적 시도를 재조명하고, 꿈과 몽상 / 여행 / 놀이와 교육론이라는 세 주제로 나누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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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내가 이 글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나?’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리송한 부분에서 끊어지는 짤막한 단편, 이것이 독일 유머인가? 싶은 독특하고 난해한 일화들의 향연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어느 행선지로 향하는 KTX에 몸을 싣고 2시간 동안 ‘2부: 여행’을 읽으며 그의 글에 푹 빠져들게 되었다. 벤야민의 글들은 기본적으로 유럽 대도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는 프리랜서 작가였던 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들어 있다. 그도 분명 어딘가로 떠나는 기차에서 떠오르는 몽상, 관찰되어지는 모든 것들을 글로 옮겼을 것이다. 그리고 ‘3부: 놀이와 교육론’을 읽을 땐 주어진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어내는 문장 공상, 머릿속에 부유하는 언어유희를 그대로 옮긴 듯한 글을 읽으며 미소 짓기도 했다. 특히 달력에 월별 별자리에 따라 코멘트를 달아둔 부분에서 말이다.

 

“중간부터 읽어도 좋다. 거꾸로 읽어도 좋다. 책장을 자유롭게 넘기며 읽을 수 있는 책,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어 지는 책.” – 파이낸셜 타임스

 

동시에 ‘파울 클레 Paul Klee’라는 벤야민이 가장 사랑했던 미술가의 작품과 그의 글을 엮어 함께 감상하도록 하는 방식이 시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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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1920

 

 

“끝없이 쌓이고 쌓이는 재앙의 잔해가 천사의 발치까지 밀려온다. 천사는 그 자리에 남아 죽은 이들을 깨우고 부서진 것들을 고치고 싶었겠지만, 천국에서 불어 닥치는 폭풍이 너무 강한 탓에 날개가 폭풍에 떠밀려 더 이상 접히지 않는다. 이 폭풍이 미래를 등지고 있는 천사를 거센 힘으로 미래로 몰아넣는 동안, 천사는 재앙의 잔해가 하늘에 닿도록 쌓이는 모습을 내내 보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들은 이 폭풍이다.” –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테제 9.

 

발터 벤야민이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 작품의 최초 소장자였으며 이에 찬사를 보냈던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치로부터 피하기 위한 망명에 실패해 국경에 발이 묶인 뒤 음독 자살한 벤야민은 1940년 죽기 직전에도 이 작품과 함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벤야민이 자살한 같은 해의 세 달 전, 클레는 나치로부터 추방된 자신의 고향 베른에서 지병으로 죽었다.

 

위에서 발췌한 벤야민의 유고서적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그가 스탈린-히틀러의 밀약을 보고 충격에서 쓴 역사와 철학에 대한 고찰문이다. 이 책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던 벤야민이 그의 먼 친척이자 벗이었던 한나 아렌트에게 전달해 무사히 출간될 수 있었다. 책의 가장 첫 부분에 나오는 작품이 바로 <새로운 천사>이다. 이 그림은 1920년, 1차세계대전에 끝난 직후에 그려진 것이다. 화면의 중앙에 선 천사를 다시 보자. 어디를 보는 것인지 모를 눈동자와 함께 활짝 펴고 있는 날개와 꼿꼿한 자세는 어딘가 묘한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파울 클레는 후일 전세계를 강타할 제2차세계대전과 이러한 전쟁을 소위 ‘진보’라고 선동하는 지도자의 등장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가 죽기 3년 전, 1937년 나치는 클레의 작품 100여점을 ‘퇴폐미술’로 간주해 압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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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 <곡예사들>, 1915

 

 

“문화적 볼셰비즘에 관여했고 또한 예술적 양심이나 주의 주장도 없으며 본능적인 감수성도 결여된 그리고 그들의 개별적인 재능이 존경을 받지도 못하는 모든 ‘추종자’들을 탄핵하고자 한다.” – 카이저, 나치 계몽선전부 책임자

 

“모든 것이 색채들의 습윤함에 잠겨 유영하는 듯 보였는데, 특히 우세한 색은 무겁고 축축한 검은색 이어서 그 꿈속 풍경은 이제 막 또 한 번 고생스럽게 경작된 농지의 풍경 같았다. 내 노년의 씨앗들이 이미 그 때 거기에 파종되어 있었다.” – 벤야민, <또 한 번>

 

그의 글들 전반에 묻어 있는 무어라 단정짓기 어려운 오묘한 우울감이 이러한 시대 배경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위태로웠던 말년의 삶과, 시대에 대한 염려가 그를 새로운 천사와 아이들의 언어유희에 매료되게 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앞으로도 이 정의하기 힘든 방식으로 매료되는 책을 두 번, 세 번 찾아 읽으며 클레의 그림과 그(벤야민)의 정신 세계와 조금이라도 더 공명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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