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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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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대 높은 영웅, 시라노의 정의와 사랑을 담은 뮤지컬 <시라노>가 삼연으로 돌아왔다.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벨쥐락』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시라노>는 거대한 코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지닌 검객 시라노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와 시라노의 고결한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초연과 재연을 거쳐 진화를 거듭하며 한국 뮤지컬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 작품은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내면의 아름다움, 자기희생,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탐구한다.


 

 

사랑의 아이러니


 

시라노와 록산, 크리스티앙 세 사람의 사랑은 시라노의 편지 대필과 대리 고백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엄청난 아이러니 속에 빠지게 된다. 록산이 크리스티앙의 외모에 처음 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발코니 장면 초반 그의 서툰 고백을 듣고는 마음을 돌리고, 크리스티앙을 진정 사랑하게 된 것은 시라노의 언변 때문이었다.

 

결국 록산이 사랑한 것은 크리스티앙의 외관과 시라노의 내면을 종합한 허상의 일종이다. 점차 이 세 사람의 관계는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두 사람이 동시에 함께 록산을 사랑하는 형국이 되어 버린다.


크리스티앙은 록산과 결혼까지 하며 사랑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고, 시라노는 편지로는 록산과 간접적으로 사랑의 마음을 나눌 수 있음에도 진짜 자신으로 록산의 앞에 나서지 못한다. 또한 록산은 크리스티앙을 향한 깊은 사랑을 불태우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이 복잡한 삼각관계 속에서 세 사람은 모두 ‘패배뿐인 승리’를 하며 진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셈이다.


시라노는 그 자체로 드라마적 아이러니를 지닌 인물이다. 그는 우스꽝스러운 코와 귀족들을 한껏 비꼬는 희극성, 그리고 차마 사랑하는 이에게 진심을 고백하지 못하고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비극성을 동시에 가졌다.

 

이렇듯 희극성과 비극성을 겸비한 시라노의 드라마적 양가성은 <달에서 떨어진 나> 넘버에서 극대화된다. 스스로가 달나라에서 온 외계인이라며 드기슈 백작을 방해하고 록산과 크리스티앙이 결혼식을 올릴 시간을 벌어주는 장면에서 부르는 이 넘버는 일견 우스꽝스럽고 재미있는 장면이지만, 그 너머 자신의 마음을 침묵 속에 묻고 록산의 사랑을 전면에서 응원하는 시라노의 희생적 사랑이 가진 비극성이 엿보인다.

 

 

 

가장 인간적인 영웅


 

폭압과 전쟁의 시대 가장 낮은 약자의 편에 서서 힘 있는 '거인'들에 용감히 맞서는 시라노는 분명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영웅이지만, 전형적인 영웅상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대개 완벽한 외모와 뛰어난 능력, 그리고 명확한 정의감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는 전통적인 영웅들과는 달리, 시라노는 콤플렉스인 자신의 큰 코를 이유로 사랑하는 록산에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대신 록산이 사랑하는 크리스티앙의 그림자가 되어 간접적으로 사랑을 전하며 자신의 진심을 묻어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큰 코라는 외모적 콤플렉스와 자신의 결함에 대해 자신감 없어하는 모습은 여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약점을 가진 시라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동시에 뛰어난 검술과 문학적인 능력을 통해 자신의 약점이 아닌 강점을 강화하며, 부조리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전투에서 가스콘 용병대를 이끄는 영웅적 결단을 지속해간다. 시라노는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고 극복하며 성장해 나가는 성장하는 인물이자,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관객으로 하여금 공감할 수 있는 매력적인 영웅이다. 그의 가장 인간적인 약점과 결함이 오히려 그의 영웅적인 면모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뮤지컬 <시라노>는 시라노의 삶을 통해 외적 아름다움과 내적 가치, 사랑, 그리고 자기희생에 대해 탐구하며, 시대를 초월한 인간 경험의 보편적 진실을 포착해낸다. 시라노의 순애보와 자기희생, 그리고 꺾이지 않는 곧은 의지는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가치들에 대한 향수와 반성을 불러일으키며,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이 여전히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일 것이다.


콧대 높지만 결코 거만하지 않은 영웅, 시라노는 우리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모가 아닌 영혼의 빛남에 있다는 오래된 진리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가진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는 신념과 내면의 가치를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영웅적인 삶의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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