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단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며 두 번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음에 영원한 시간을 통틀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항상 제때를 놓치고 일을 뒤로 미루며 단 한 번도 미래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주저하는 동안 그렇게 생은 흘러가버린다.” - 에피쿠로스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요즘이다. 누군가는 그랬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고. 아마 나는 요즘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 행복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행복에 대한 고민은 수십 세기 전 헬리니즘 시대의 철학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는 아테네에 정원 딸린 집을 구입해 여러 제자들을 모아서 ‘행복한 삶'은 무엇인지 가르쳤다. 제자들 중에는 여성과 노예도 있었으며, 에피쿠로스에게 배움을 얻고 싶은 모든 사람들은 그의 정원에 모여 어떻게 개인의 삶 속에서 행복을 이룰 수 있는지 토론했다. 에피쿠로스에게 행복은 동시대의 철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전체의 참여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고 신으로 부터 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행복이란 정원에서 핀 꽃 한 송이에서 찾을 수 있는 것과 같았다.
쾌락의 철학
“쾌락은 행복한 삶을 형성하는 알파요 오메가라고 나는 주장한다. 우리는 쾌락이 우리의 첫째가는 선천적인 재산임을 알고 있으며 우리의 추구와 회피를 쾌락에 의해 조종하며 모든 재화를 쾌락을 기준으로 측정한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쾌락의 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 가장 추구되어야 할 것은 헌신이나 의무, 신의 뜻과 같은 것이 아닌 개인의 쾌락 그 자체였다. 그가 살던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 도시국가가 무너지고 추구해야할 고전적 삶의 이상마저 사라져 모든 사람들이 혼란과 동요에 빠져버렸다. 이때, 전체 질서에 개인을 편입시키는 철학자들의 말과 달리 에피쿠로스는 그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말자며 개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우리는 타인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구 가운데 어떤 것은 자연적이고 어떤 것은 공허하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자연적 욕구 가운데 일부는 필수적이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필수적인 욕구 가운에 어떤 것은 행복의 달성을 위해 필요하며 어떤 것은 우리의 건강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하고 또 다른 것은 생존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그의 철학이 쾌락을 추구했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쾌락을 맹목적으로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욕구를 분류하여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해야할 쾌락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의 욕구 대부분이 자연적이거나 필수적이지 않으면서, 외부가 규정한 공허한 망상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이런 욕망의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얻었음에도 행복을 주지못하고 오히려 고통을 주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는 진실로 바라던 것에서 오히려 괴로움을 얻을 때가 종종 있는데 이것은 그의 말에 따르면, 추구될 필요가 없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오직 자연적이고 본래적인 욕망이 추구되고 충족될 때 참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참된 쾌락은 무엇일까? 참된 쾌락이란 정적인 의미의 쾌락이다. 결핍을 충족시키며 얻는 쾌락이 아닌 고통의 부재가 쾌락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육체에는 고통이 없고 마음에는 불안이 없는 ‘평정상태(ataraxia)’에 도달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불완전성에서 오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에서 어떤 확신을 얻기 전까지는 그 영혼이 동요속에 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이 모든 혼란과 광기를 걷어내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이성’으로 깨어 있어야 가능하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
“고통은 몸 속에서 끊임없이 머물지 않는다. 고통이 격렬하면 할 수록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고통이 쾌락과 함께 병존하며 몸 속에서 서서히 강해진다면 그 고통은 여러 날 지속되지는 않는다. 길고 긴 고통 속에서도 쾌락은 여전히 몸속의 고통보다 더 크다.”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이때 필요한 것이 이성이다. 에피쿠로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육체의 고통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니다. 격렬한 고통은 짧고, 잔잔한 고통도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이성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불안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한편, 우리는 육체에서 고통을 제거해야할 뿐 아니라 영혼에서도 고통을 추방해야하는데, 영혼을 괴롭게 하는 것은 ‘필연적 죽음’에 대한 생각이다. 그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불행중에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하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산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아무 연관이 없다. 산자에게는 죽음이 없으며 죽은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간이 죽음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생각하면 슬퍼지는 것을 넘어 큰 두려움이 몰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은 나 자신의 절대적 소멸이기에 죽음이 나를 찾아올 때는 그것을 마주할 내 자신이 이미 사라져 버린 뒤다. 죽음이 찾아 왔을 때는 의식과 감각이 없기에 고통을 느낄 수가 없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이 없으니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멸에 대한 공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가. 하지만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마음 속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그의 말처럼 마음 속 불안을 완전히 추방할 수 있도록 죽음을 이성으로 인식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수천 년 전 죽음과 괴로움에 대해 고민하는 한 인간의 말에서 나는 어떤 위로를 느낄 수 있다. 우리 삶에서 두려움을 없애고 생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꽃 한송이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인간 삶이라고 하는 그의 말은 그의 정원처럼 굉장히 따스하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대해 더 알고싶다면 그의 저서<쾌락>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