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것들은 어디에나 있다
유물이라고 하면 두 가지 감상이 동시에 떠오르곤 했다. 하나는 아름답고 예스러운 것, 아주 멋진 것이라는 생각. 다른 하나는 그래서 나와는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생각.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그것들에는 숨은 이야기가 잔뜩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 진가를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서헌강 작가의 책 《나는 오늘도 유물과 대화하러 간다》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이다. 더 배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면 조금이나마 우리나라를 더 잘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단순히 정보값을 채우려던 내 생각과는 다르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책의 첫 단락에서는 전통 건축물과 고궁을 찍은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옛 사람들이 살아 숨쉬었을 그 공간을 사진에 담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사진가의 고군분투가 담겨 있다. 책장을 넘기던 내 눈을 사로잡은 단어는 '동구릉'이다. 지하철 8호선을 타고 다니며 매일같이 지났던 그 동구릉에 태조 이성계가 안장된 건원릉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그곳에 조만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최근에 부여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봤던 '정림사지 오층석탑' 사진도 등장했다. 막연하게 한국은 전통을 지키려고 하지 않고, 삭막하게 현대화되어버렸다며 투덜거리던 때가 있었다. 남탓하며 내 무관심을 무마하려고 했던 당시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바로 옆에 있는 우리 문화를 나는 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문화유산을 지키는 사람들
눈을 조금만 돌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화유산은 당연히 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아니다. 그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먼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헌강 사진작가 본인이 그렇다. 월간지 《샘이깊은물》의 사진기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그는 문화유산을 사진으로 기록하며 문화 다큐멘터리에서 커리어를 이어왔다. 이 책은 그가 30여 년 동안 촬영해온 문화유산의 회고록인 셈이다. 그의 사진은 우리 문화유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서헌강 작가가 만난 사람들 역시 그렇다. 그가 종묘를 촬영하기에 앞서 끈질기게 연락했다던 종묘 정전의 관리자. 효종릉 촬영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영릉소장. 전통가옥의 관리자.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학예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문화유산을 지키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아예 인간문화재라고도 불리는 국가무형유산 보유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옹기를 만들고, 윤도(전통 나침반)를 만들고, 기와를 만들고, 한지를 만든다. 요즘 사람들은 옛것의 미학을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우리 전통을 이어가는 이들의 존재가 너무나 뚜렷하다.
사진에 담긴 마음
사실 책을 펼치기 전까지만 해도 저자가 어떤 사진을 찍기 위해 연출을 어떻게 했다는 식의 기술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사진작가의 책이니 당연히 노출이니, 셔터스피드니 하는 전문 용어들을 기대했던 것 같다. 뜻밖에도 이 책은 오히려 저자의 문화유산 예찬론에 가까웠다. 그만큼 서헌강 작가가 우리나라의 유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느껴졌다. 장면 안에 꼭 담아내야 할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이곳에서 펼쳐졌던 역사는 어떤 모습이었고 그걸 얼마나 담아내고 싶었는지가 주를 이루었다.
문화유산을 촬영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 중 하나가 사진을 본 사람들이 그 안의 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는 사진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단 한 장의 사진만으로 문화유산의 가치를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으니 사진을 매개체로 삼았으면 한다. 내 사진을 보고 호기심이 생기고, 자료도 찾아보고, 또 직접 가보기까지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즉 '우리 문화유산이니까 중요하지'가 아니라 '과거의 시간을 넘어 현대와 호흡하며 교감하는 곳이니까 중요하지'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p.69 능선 위 성곽이 만드는 두 개의 풍경, 한양도성
그 열정이 놀라웠다.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 지점에서 매체의 속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진도 글도 그림도 결국은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다. 나는 가끔 이 매개체를 얼마나 잘 '완성'하는지에 집중한 나머지, 어떤 생각을 담고 싶은지에 대한 숙고를 잊는 것 같다. 서헌강 작가는 사진을 찍는 행위가 즐거워서 사진작가를 꿈꿨다고 했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 들었던 다음의 질문을 듣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었다고 한다.
책을 덮은 뒤로 줄곧 나 역시 이 질문을 되묻고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글을 쓸 수 있을까? 서헌강 작가가 문화유산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듬뿍 쏟았듯, 나 역시도 지키고 싶은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 답은 잘 모르겠지만, 두려움은 접어두고 설렘만 가져가보려 한다.
"난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 무용을 선택했어. 사람은 한번 태어나면 어떻게든 다 살게 마련이지만, 넌 사진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란다. 난 네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사진작가가 됐으면 좋겠구나."
그때만 해도 나는 막연히 사진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사진을 전공해야겠다고만 생각했지, 그 이후에 어떤 사진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날 매형이 던진 화두는 삶과 예술에 대해 철학적 고민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평범한 고등학생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대학생이 된 후 나는 '사진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찍을 것인가'에 대해 근원적 성찰을 했다.
p.252 사진, 삶의 질문이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