퓰리처상을 상징하는 금메달에는 정작 상을 만든 조지프 퓰리처의 얼굴이 없다. 앞면에는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을 구축한 벤저민 프랭클린이, 뒷면에는 인쇄공과 프레스 기계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조지프 퓰리처 본인이 파나마 운하 비리 등 부정의 폭로를 대원칙 삼아 언론의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저널리스트임에도, 시상의 주인공으로 나서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퓰리처상을 가로지르는 정신이 '저널리즘'이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을 올바르게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본인 대신 저널리즘의 정수를 실천하자는 의지를 담은 셈이다. 퓰리처상이 기자들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이유다.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Shooting the Pulitzer, 퓰리처상 사진전'은 지난 1942년부터 2024년까지 8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퓰리처상 수상작들이 담은 역사의 장면들을 한데 모았다.
2020년대 한복판에 열린 퓰리처상 전시가 가지는 의미를 살펴봤다. 그동안 언론은 무엇을 지키고, 어떻게 변화를 이끌어왔는가?
과거와 현재
흑백 사진이 컬러로 바뀌고, 순간의 자극적인 장면에 치우치지 않도록 SPOT / FEATURE 부문을 나누는 등 변화를 거듭해온 퓰리처상이지만 변함없이 꾸준히 등장한 주제들이 있다.
• 인종차별을 다룬 주요 수상작들 : <새로운 친구와의 인사> 마이클 코어스, 1975 / <더럽혀진 성조기 > 1975, 스탠리 포먼 / <퍼거슨의 시위> 로버트 코헨, 2015 / <거꾸로 든 성조기> 율리오 코르테즈, 2020
인종차별은 세기의 구별을 두지 않고 꾸준히 이어져 왔다. 다만 이를 다룬 사진의 온도가 조금씩 오르내리며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크기변환]_새로운 친구와의 인사.jpe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2/20250209151723_sdqiykrx.jpeg)
<새로운 친구와의 인사>는 따스한 온도로 아이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지난 1975년 연방정부가 '인종 간 통합교육'을 시행하기로 결정하면서, 당시 켄터키주의 루이빌에서 최초로 통합학교가 출범했다. 흑인과 백인이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변화는 당시에 큰 파장을 불러왔으며, 사회 갈등으로 직결된 바 있다. 두손을 맞잡은 소년들 뒤로 햇살이 비치는 모습은 인종을 나누고 갈등하기 바쁜 어른들의 모습 뒤에 순수하게 우정을 나누는 아이들의 면모를 부각시킨다.
![[크기변환]_더렵혀진 성조기.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2/20250209151741_eqaurpqw.jpg)
![[크기변환]_거꾸로 든 성조기.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2/20250209151754_mkguigdg.jpg)
한편 미국의 성조기를 둘러싸고는 상반된 온도의 사진이 남았다. <더럽혀진 성조기>에는 앞서 <새로운 친구와의 인사>의 배경이 된 인종차별철폐 정책에 분노한 백인 학생이 지나가던 흑인 변호사를 공격하는 모습이 담겼다. 자유의 상징인 성조기가 차별의 무기로 쓰이는 모습을 다소 차갑고 관조적으로 그려냈다.
<거꾸로 든 성조기>는 뜨겁게 타오르는 건물 앞에 '불명예'를 뜻하는 뒤집힌 성조기를 들고 뛰어가는 시위자의 모습을 담았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흑인 청년 조지 플루이드가 목숨을 잃은 이후, 차별에 맞서 더욱 강력해진 저항 의지를 프레임 안에 가득 채워 선보였다.
• 전쟁과 난민을 다룬 주요 수상작들 : <이오지마의 성조기> 1945, 조 로즌솔 (제2차 세계대전)/ <부서진 다리를 건너는 한국의 피난민들> 맥스 데스퍼, 1950 (한국 전쟁) / <전쟁의 공포> 후잉 꽁 웃, 1973 (베트남 전쟁) / <귀향 환영> 크레이그 F.워커, 2011 (이라크 전쟁) / <슬픔에 빠진 아들> 로드리고 아브드, 2013 (시리아 내전) / <장벽에 막히다> 김경훈, 2019 (카라반 이민자 행렬)
인간사에서 빼놓을 수 없고, 지금도 계속해서 세계 곳곳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 전쟁이다. 의심이 여지없이 가장 큰 넓은 고통과 후유증을 남기기 때문에, 또 지역갈등/난민 등 여러 사회문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기 때문에 사진작가에겐 이를 기록하는 것이 숙명과 다름 없는 과제다.
![[크기변환]_전쟁의 공포.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2/20250209151824_xqhcsrpn.jpg)
1940년대까지만 해도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린 이오지마의 성조기와 같이 전쟁의 업적을 숭배하는 듯한 구성의 사진이 주목받았으나, 1960년대부터는 영웅보다는 잔혹함과 고통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쟁에 대한 인식을 바꿔냈다. 특히 <전쟁과 선포>는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공군기가 떨어뜨린) 네이팜탄을 맞은 소녀가 화상을 입은채 알몸으로 뛰어오는 모습을 포착해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크기변환]_귀향환영.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2/20250209151844_kwlmapes.jpg)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0년대에는 전쟁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더욱 섬세하게 그려낸 모습을 볼 수 있다. <귀향 환영>에는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병사가 27세의 나이로 전역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모습을 담았다. 스콧 오스트럼이라는 이름의 이 청년은 스스로를 '잔인한 살인마'라 칭했으며, 당시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 다섯명 중 한명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 크레이그 워커는 9개월 동안 스콧의 곁에 머물며 그의 고통을 사진으로 남겼다. 전쟁이 남기는 폐해가 이토록 깊고 넓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현재와 과거
현재 전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는 정치 혼란과 탈세계화다. 수장이 사실상 공백 상태에 놓인 한국뿐 아니라 내각 붕괴 위기에 놓인 프랑스, 총리가 사임을 선언한 캐나다 등 각국이 정치적 수렁에 빠져 있다. 그리고 국제 관계의 핵심이 미국에서 대통령이 관세전쟁을 예고하고 나서면서 세계화의 둥지 역시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반추할 만한 과거의 퓰리처상 수상작들을 꼽아보자면 아래와 같은 3개의 작품을 언급해 볼 수 있겠다.
![[크기변환]_Adlai_Bares_His_Sole.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2/20250209151904_giswtaem.jpg)
<아들라이 신발 밑창을 드러내다>는 1952년 전쟁영웅 아이젠하워와 맞붙었던 미국 대통령 후보 '아들라이 스티븐슨'의 구멍난 구두를 포착했다. 한 나라의 수장직을 두고 경쟁할 정도로 정치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밑창이 닳아 구멍이 뚫릴 정도로 검소한 모습은 지도자의 덕목을 돌아보게 만든다.
![[크기변환]_202005051372016974_2.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2/20250209152004_sbfkhndu.jpg)
<홍콩 시위>는 경찰의 진압용 방패와 함께 그 아래 절규하고 있는 여성을 앵글에 가득 채워 담았다. 좌절과 열정이 뒤섞인 표정에 많은 감정이 함축돼 있다. 시위의 배경은 지난 2019년 홍콩 정부가 제출한 범죄인 인도 조례(홍콩 내 범죄자를 중국 본토로 송환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로, 중국으로부터 홍콩의 정치적 자유와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시작됐다. 이는 달리 말해 홍콩의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크기변환]_117478_97023_4347.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2/20250209152019_knhuombw.jpg)
낯선 병마로 전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한 코로나 시기, 애틋한 사랑으로 이를 극복하는 노부부의 모습을 담은 사진 <포옹과 키스>다. 두사람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102일만에 다시 만났다. 사랑하는 이를 눈앞에 둔 채 플라스틱벽만으로 온기를 나눠야 하는 상황이지만, 우리에겐 아무리 낯설고 두려운 순간일지라도 서로를 향한 마음은 굳건하다는 메세지를 전해준다.
전시를 방문한 이들이 저마다 눈에 담고 가슴에 묻은 작품들은 천차만별일 것이 분명하다. 1969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에디 에덤스는 "당신을 웃거나, 울거나, 가슴 아프게 한다면 제대로 된 사진"이라는 말을 남겼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작품을 통해 받은 울림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켜나가는지다. 이 글을 보고 전시를 방문하게 된다면, 스스로에게 울림을 준 작품 한가지를 꼽아보시라. 그리고 기자가 때로는 절박하게, 때로는 비장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그 순간을 상상해보시길 바란다. 조지프 퓰리처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