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는 죽어서도 광대가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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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청망청, 이 사자성어는 ‘맑게 일어나서 맑게 망한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이 말의 유래를 알기 위해선 조선시대로 돌아간다. 당시 지방의 아름다운 처녀를 뽑아 각 고을에서 기생으로 관리했다. 기생이 궁궐로 들어가면 ‘흥청’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왕은 밤낮으로 흥청들과 놀며 국정에 소홀했을 뿐만 아니라, 무력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중종반정으로 자리에서 쫓겨나 목숨까지 잃게 되어 망했다고 전해지는 이 이야기는, 권력에 취해 본분을 잊은 왕, 연산군의 이야기다.
그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영화 중, <왕의 남자>는 2005년 12월에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작품이다. 탄탄한 스토리 구성과 연출 등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아, 당시 입소문만으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명작으로도 불린다. 물론 영화가 전체적으로 연산군을 다루고 있지 않고, 또 역사적 배경 외에도 소설적 요소들이 많지만, 그려진 상황에는 당시 연산군의 ‘흥청망청’ 모습이 많이 담겼다.
그런 사회 모습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광대’들. 감우성 배우가 연기한 '장생', 그리고 이준기 배우가 연기한 '공길'은 계급도, 생활 모습도 왕과 천차만별이지만 누구보다 광대로서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끝까지 역할을 다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두 사람을 포함한 다섯 광대는 한양에서 명성을 알리게 되어 궁으로 입성하게 된다. 왕을 풍자한 것을 잘못으로 삼아 벌을 주려는 이에게, 왕을 웃겨 보겠다고 말한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비꼬는 게 아니지 않냐며 자신만만해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왕을 웃기기에는 성공했으나, 광대로서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호화로운 줄만 알았던 궁궐 내에서는 질투와 오해 등으로 생각보다 더 복잡한 이해관계들이 맞물려있었고, 그제야 광대들은 다시 궁을 떠나겠다고 결심했지만, 점점 놀음과 공길에게 마음을 빼앗기던 연산군에게 자칫 잘못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던 상황이 발목을 잡았다.
감독은 당시 시대의 흐름에 대해 이렇게 짚었다.
20세기는 흑백논리가 만연하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다. 그런데 21세기는 개인주의가 존중받는 시대다. 개인주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모호하게 반응한다.
- 이준익 감독, <한겨레>와 인터뷰 中
영화에서 개인주의는 배우 ‘이준기’로 실현됐다. 실제 그가 맡은 ‘공길’이라는 캐릭터는 남성이지만 중성적이기도 한 모습으로 왕의 마음을 신비롭게 흔들리게 했던 캐릭터다. 맞고 틀리다, 옳고 그름이 명확했던 이전 세기와는 달리, 신세기가 열리며 다채로운 목소리와 개인이 등장하고 존중받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영화의 모든 순간에서 장생과 공길을 포함한 광대들이 자신의 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엿볼 수 있다. 광대는 해학적인 장면을 직접 연기하며 현 정권의 비판점을 깊숙하게 찌른다. 주위를 둘러싼 서민들에겐 웃음을 주지만, 주요 세력들에겐 이런 모습이 미움, 비난받을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광대의 상징인 '줄타기'와 '부채'를 놓지 않았다. 광대와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감독이 연출하고자 했던 ‘탈이데올로기’이자 ‘개인주의’ 극치를 보여준 것이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시대가 바뀌었다. 그러나 역사는 다시 반복되고 있다. 연산군의 폭동과도 같은 이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국회 앞 개개인이 가진 다채로운 응원봉을 들고 목소리를 내려는 수많은 예술가를 보자니, 우리의 존재를 사랑하려는 무수한 용기들로 빛나고 있는 것만 같다. 장생과 공길처럼, 개인의 위치와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하며 만들어낸 끈끈함 또한 엿보게 된다.
영화 <왕의 남자>의 ‘왕’은 연산과 장생 모두를 뜻한다. 특히 장생은, 놀음판에서는 세상의 왕 못지않다고 생각해 당당히 궁궐로 입성한 인물 그 자체라고 감독은 설명했다. 운명을 거스르며 세상과 나를 동등하게 두고 보는 그의 모습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뚜렷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오롯한 개인으로서 세상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내게 맞추는 일인 셈이다.
따라서 오직 이 펜이라는 하나의 무기를 들고, 시야에 담긴 세상에 단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 파편화된 모든 자유가 부디 망설이지 말고 펜을 들길. 그 ‘하나’들이 모여 세상을 향해 ‘힘껏’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왕의 남자>, 광대, 예술가가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바라온 가치라고 믿기 때문이다.
[박정빈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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