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함] 편지. 활공하는 마음

당신은 지금 어느 하늘을 배회하고 있습니까.
글 입력 2024.08.2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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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이야기 : 환상통과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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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종종 궁금합니다. 허공에서 널따란 곡선을 그리다가 땅 위로 착지하는 새의 마음은 어떠한지요. 어디서 왔을까. 왜 여기까지 날아왔을까. 무엇을 위해 저리 느긋하게 활공할까. 길고 넓은 물가에서 왜 꼭 저 자리에 착지했을까. 아마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테고, 각자에게 도래한 우연이 있을 테지요. 저도 당신도. 저에게도 당신에게도요. 그러므로 그저 필연과 우연이 반복되는 가벼운 삶의 형태를 상상해봅니다. 필연과 우연이 뒤섞인 삶의 오묘한 순간들도요.


잠시 소개를 하자면 저는 우연을 아끼는 인간입니다(이름이나 사연 같은 건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을 테니 생략하겠습니다). 앞서 말했듯 제게 삶이란 그런 형태여서, 이번 여름에도 여러 우연을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살갗에 닿는 온도가 선연하고 푸르름이 무성했던 여름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니 이상하게 당신이 자꾸 아른거리더군요. 유독 선명하게, 그리고 반갑게. 필연과 우연 뒤섞인 오묘한 삶의 순간 중 하나가 이번 여름에는 당신이었나봅니다.


때는 7월의 장마철이었습니다. 거듭되는 소낙비 탓에 습기의 변덕이 잦은 시기였습니다. 저는 평소처럼 휴식 시간을 빌려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이었고, 수변 공원 물길을 가로지르는 다리 하나를 건너다 수풀 사이에 선 당신을 발견했지요. 저는 온통 회색빛인 풍경 속이었고 온몸에 눌어붙는 습기에 시야가 어룽거렸었고, 물방울 맺힌 들풀과 갈대가 무성해 시푸른 풍경 속에 아주 하얀 당신이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박하 향처럼 환한 새하얀 빛으로. 저는 더위를 피하려 바삐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물가를 따라 난 길에 가만히 서서 당신을 지켜봤지요. 그게 우리의 첫 조우였습니다.


그 이후로도 당신은 꼭 오전 10시 50분경에 공원 호수에서 북쪽으로 난 세 번째 다리 주변 수풀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더군요. 그리고 제 추측이 맞다면 당신은 햇빛 따사로운 날엔 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꼭 비가 촉촉하게 내린 뒤 먹구름 흐린 날에 원래 늘 거기 있었다는 듯이 나타났습니다. 얼핏 보면 좀 까다로운 산책 조건인데, 7월에는 꽤 무난한 산책 조건인 것 같습니다. 우리 그만큼 자주 조우했었으니까요. 짙은 비가 적시고 간 자리가 궁금해 세상에 내려오는 비의 정령이 있다면 아마 당신처럼 물가를 오가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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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당신이 제 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당신은… 무척이나 가늘었습니다. 긴 목과 둥근 그릇 같은 몸을 그 방향으로 마주하니 얄따란 호리병 같았습니다. 제 팔뚝보다 얇은 몸을 보자니 ‘툭 치면 픽 쓰러질 것 같은데 어떡하지’ 그런 괜한 걱정을 잠시 하기도 했었구요. 그러고 나선 얇고 긴 몸으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그토록 가벼운 몸으로 세상을 가로지르는 삶은 어떠한지요.


당신은 인간의 몸에 대해 잘 모를 테니 잠시 말씀드리자면, 인간의 몸은 참 무겁습니다. 그 살덩이의 무게도 무게지만 이건 비밀인데, 인간의 몸은 실재하지도 않는 마음 때문에 지나치게 무거워지기도 하는 이상한 몸입니다. 누군가에겐 아주 가볍다가도 동시에 누군가의 앞에선 아주 무거워지고 마는 모순을 제 몸의 무게로 머금은 생명체죠. 혹시 새도 그렇습니까. 새도 마음 탓에 몸이 무거워지곤 하는지요. 그 전에, 새에게도 마음이 있습니까. 활공하는 삶을 위해 변덕 잦은 마음을 애초에 품지 않았으려나요. 그렇다면 새들도 우연을 우연이라 부릅니까. 우연과 필연을 구분하는 건 마음이라 생각하는 탓에… 궁금해졌습니다. 혹시 정말 마음이 없다면 마음 없는 가슴으로, 몸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입니까. 그 가벼운 몸으로 하늘을 자유롭게 부유하는 … 삶. 사실, 저는 제발 그만 무거워지고 싶습니다. 그만 가라앉고 싶습니다. 침잠할 심연이 남아있는 마음의 흔한 소망입니다. 산뜻하고 가뿐한, 초연하고 공허한, 가벼움, 텅 빈 가벼운, 마음. 그런 감각만 힘껏 품에 안고 살아보고 싶습니다. 정말 제 몸으로도 그런 호흡이 가능하다면 잠시 아주 조금만 느껴보아도 좋으니, 그런 무게로 살아가는 기분을 기억해보고 싶습니다.


영원히 회신이 오지 못한다는 걸 알고서 시작한 편지인데 문득 간절해집니다. 조금. 많이. 음. 무엇이 간절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간절합니다. 어디로도 닿지 못할 간절함을 곱씹을수록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지만 당신을 떠올리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아 기묘한 안도감이 듭니다. 그림자 드리운 녹음 위를 날개 활짝 펼쳐 날아오르는 당신을 상상해봅니다. … 하늘로 벗어나 나를 가둬둔 세상을 내려보다가도 다시 그 세상을 향해 차분히 내려올 수 있는 덤덤한 날갯짓. 그 자유로운 활공과 착지. 몸의 필연이 된 날개. 영원히 흐르는 세상 속 그 어느 곳에도 담담히 내려앉을 수 있는 마음. 나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마음껏 도망치다가도 홀연히 제자리로 복귀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벼운 마음을 갖고 싶습니다.


제가 아무리 말해도 당신에겐 여기에 쓰인 모든 게 부질없겠지요. 문득 그런 생각이 강렬하게 일어나는데… 허파 깊은 속 아득한 데에 웃음이 고이는 것 같습니다. 여태 쓰인 마음은 여러모로 진심이기 때문에 가벼운 헛웃음은 내뱉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 쓰인 제 모든 말마디가 마음, 또 마음이군요. 새들에겐 우리 같은 마음이 없을 수도 있는데. 마음으로서 말할 수밖에 없는 나를, 당신은 이해할 수 있을까요. 결국 닿지 못할 문장들을 거듭하는 동안 당신과 눈을 맞췄던 찰나 몇 개를 자주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우리 내년 여름엔 마주칠 수 있을까요. 저는 바보라서 당신이 아닌 다른 백로가 날아와도 작년의 당신이 또 왔다며 반가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년 여름 장마철에는 당신을 찾기 위한 산책을 이 수변 공원에서 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같은 자리에 안 보이면 제가 먼저 나서보려고요.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을 다시 조우하고 싶습니다. 이번 우연에 그렇게 필연을 덧붙이면, 정말 당신과의 오묘한 순간이 반복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 순간이 반복된다면, 우리의 조우는 무언의 약속이 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당신은 제게 여름마다 떠올릴 의미 - 여름이 오면 짝사랑하는 상징, 멀찍이 공존하는 벗, 아드막한 안개 속 추억 등등 - 그리고 잊지 못할 기억이 될 테지요. 이 커다란 꿈은 앞으로 다가올 여름에 부쳐두겠습니다.


구구절절 다 써놓고 하기엔 다소 뒤늦은 말입니다만.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굳이 당신까지 불러와 짧지 않은 편지로 쓰고 있는 저 자신이요. 저는 과연 인간 중에서도 이상한 인간인가 봅니다. 근데 이런 이상한 편지 쓰기가 제겐 포근한 기억법이어서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인사를 고민하며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결국 닿지 못할 말을 구태여 쓴다는 건 무엇일지. 그건 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야 하는 말이 있다는 것이고, 그만큼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이고, 그걸 굳이 편지로 남긴다는 건 그만큼 이 마음을 되새기고 간직하고 싶다는 의미 아닐까요. 제 소개를 뒤늦게 덧붙이자면, 저는 우연을 간직하는 걸 좋아합니다. 모호할수록 오묘할수록 더 간직하고 싶어 하죠. 그러니까, 당신이 우연히 들어섰던 이번 여름과 이 마음을 기억하고 싶어 이런 미련한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겁니다. ‘새에게 편지 쓰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그나마 명료한 해명은 이뿐인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처서가 지나 가을을 앞두고 공원의 들풀이 모조리 잘려 나갔습니다.

풀 비린내 그득한 광경 속에서 공허한 마음으로

당신이 안온히 머물 자리가 사라졌으니 더 이상 돌아오지 않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하늘을 배회하고 있습니까.

저는 마음 때문에 여름이 훌쩍 지나고 나서도 발 디딘 계절을 쉽게 떠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게 남긴

이런 무게의 대비

이런 낯선 중력

몸을 거스르는 마음

 

탓에, 나는 망설입니다.

그러나 취약한 용기만이 고요히 맴돌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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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금) 3. 2024. 여름

 

 

 

[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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