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함] 환상통과 후일담

잘 지내요?
글 입력 2024.08.24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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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발신음이 울린다. 정말 전화를 받을까. 혹시 장난으로 이상한 번호를 준 건 아닐까. 그의 오두막에 놀러 갔던 날이 떠오른다. 빛바랜 진녹색 로코코 벽지가 발린 벽. 거기에 대롱 걸려있던 오렌지색 전화기. 이상하게 그 장면이 눈에 밟혔었다. 이끼 향 나는 오두막과 귀여운 전화기는 서로 영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그런 이질감이 참 그다운 것 같기도 하고. 검지로 두드리면 통통 공허한 소리 내던 오렌지빛 전화기는 쌓인 먼지며 허옇게 뜬 빛깔을 보면 꼭 오래된 플라스틱 장난감 같았는데. 그의 쪽지가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저 멀쩡히 작동하는 전화기였던 셈이다. 두서없는 상념이 거기까지 닿은 순간, 발신음이 툭 끊기더니 수화기 들어 올리는 소리가 달그락 울린다. 뒤이어 호흡을 고르는 듯 짧게 들이키는 숨소리가 지지직거리며 귀를 간지럽힌다)


아, 받을 줄은 몰랐는데. 오랜만이죠? (전화를 먼저 거는 건 참 낯설어서, 멋쩍은 웃음이 나온다) 예전에 당신이 정말 되는 전화기라면서 쪽지에 적어준 번호로 전화한 건데, 그 오렌지 전화기요. 진짜 되는 거구나… 저 속이는 건 아니죠? 아, 별일은 아니고 뭐랄까. 그냥 하고 싶었어요, 전화. 그뿐이냐고요? 음… 아직 잘 시간 아니죠? 사실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물어봐도 돼요? 응, 어려운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당신은 잘 지내요? (전자음으로 치환된 수화기 너머의 웃음소리가 나직이 쪼개져 귓가에 토도독 닿는다) 응? 정말 안부 따위나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냐고요? 당신은 날 너무 잘 알아. 그럼 바로 솔직한 이야기로 넘어갈까요. 이미 예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 얘기를 좀 하고 싶었어요. 제멋대로인 이상한 헛소리요(조금 자조적인 투로 내뱉었다. 가볍게 웃으며 생각 정리를 조금 하고). 그러니까… 저는 아까 그 안부 인사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미칠 것 같아요. 아까 그 인사요. “잘 지내요?”


저는 잘 지낸다기보단 잘 지내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요.


뭐랄까. 이대로는 잘 지낼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딱히 없는 것 같아 약간의 새드 엔딩에 도달한 참이에요. 응, 슬퍼요. 결국 바꿀 수 있는 건 마음뿐이라는 어딘가 뻔한 플롯을 쥐고 엔딩 이후의 후일담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상상하다 보니 요 질문이 자꾸 떠오르는 거예요. “잘 지내는 마음은 무엇일까?”


정말… 뭘까요? 잘 지내는 마음. 잘 지내려는 마음. 저는 넋이 나간 얼굴 하고선 긍정 회로를 억지로 돌려 만든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어요. 저는 곧잘 그랬거든요. 그리고 나선 빈손을 움켜쥐고 ‘그래 니들 맘대로 해라’ 관망하는 얌전한 해탈이 생각났어요. 멀겋게 웃다가 지치면 곧잘 그랬거든요. 근데 그렇게 손 놓다가 최악에 다다르면 난 어떡하지? 갑자기 두려운 거예요. 유리 재질 마음속에서 두려움에 팔딱팔딱 애쓰는 물고기의 이름은 불안인가 봐요. 나인가 봐요. 아이참, 이건 꿈이 아니라니까요. 오늘 낮에 분명 전 사람들 앞에서 몰래 숨을 헐떡였고, 넋이 나간 얼굴로 긍정 회로를 돌리며 억지로 미소 짓고 있었어요. 빈손을 움켜쥐고 얌전히 해탈하고 싶단 마… 네? 그만하라고요? 잘 지내려는 마음은 이런 게 아니에요? 아, 이미 한 얘기라고요. 응 알았어요. 그만 얘기할게요.


그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볼게요. 잘 지내는 마음. 잘 지내는 마음. 아, “마음아 잘 지내?” 그런 걸 물어봐야 하나….


그러겠니?


(심장이 덜컥) 잠깐. 쉿. 제 마음이 언짢은 목소리를 내요. 그럴 리가 없다니요, 정말이에요. 분명 저한테 ‘그러겠니?’라고 했어요. 어떡해. 온몸이 고장 나는 기분이에요. 정말 아니었나 봐요. 내 마음은 잘 못 지내고 있었던 거예요. 근데 잘 못 지내고 있었다는 건 새드 엔딩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는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무서워지는 걸까요. 마음마저 나에게 실망한 탓일까요. 마음은 제게 화가 났을까요. 마음이 나로부터 유리되는 것 같아요. 아니 이미 날 떠나고 있어요. 마음이 제 명치께에 텅 빈 구덩이를 남기고 창가로 걸어가고 있어요. 사라지고 있어요. 혹시 마음이 갈 만한 따스한 세계에 대해 아시나요? 마음은 날 떠나서 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걸까요. 걱정돼요. 뒤쫓아가 봐야겠어요. 네? 수화기를 놓지 말라고요? 왜요?


(그는 나에게 핸드폰이 아니라 유선 전화기를 선물해 줬었다. 왜 하필? - 하는 눈빛을 보내자 “또 대책 없이 도망만 다니면서 쉴 틈 없이 슬퍼할 거잖아요. 슬픔 마저 두렵다고 어디 숨어 사라지지말고 당신 자리로 계속 돌아왔으면 해서” 하던 그의 목소리가 기억에 또렷하다. 마른 벽돌처럼 담담했던 목소리가. 그래서 지금 난 어디 더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의 오두막에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벽자색 수화기를 쥐고 있다) 나는 마음을 잡아야 해요. 물론… 네, 끝까지 따라갈 자신은 없어요. 슬프네. 근데 기대하다 커다래진 마음을 놓치면 상실감에 더 괴로울 게 뻔하니까. 네, 저는 그것도 두려워요. 그리고 있잖아요, 저희가 이런 얘기나 하는 동안 이미 갔어요. 마음의 뒷모습조차 이젠 보이지 않아요. (나도 모르게 손이 허예지도록 수화기를 움켜쥐었다) 뭐가 괜찮아요, 저는 불안해서 미치겠어요. 이렇게 마음을 영영 잃는 걸까요?


(나와 그의 침묵. 시야에서 사라진 마음. 가볍고 공허한 가슴만 남음. 누군가 떠오를 것 같은데 거기까지. 얼마 후 반투명한 손끝에 혈색이 가만히 고인다) 있잖아요, 텅 빈 가슴을 안고 잘 지내는 법은… 새에게 물어보면 될까요. 새가 싫어할까요. 응, 그건 걱정 안 해도 되겠죠? 저는… 새만 보면 마음이 비눗방울 모양이 되어요. 호흡 품어 영글더니 어디론가 날아다니고, 그것도 아주 가볍게. 활공. 그러다가 하늘 너머로 홀연히 톡 사라지잖아요. 가벼운 마음. 저는 그 텅 빈 가슴을 새에게서 배우니까… 아, 요즘 수변 공원 호수 북쪽 물길에 난 세 번째 징검다리에 백로가 찾아오는데, 호리병 같은 몸을 가지고 있으니 마음 잃은 기분에 대해 잘 알지도 몰라요. 비가 오는 날을 잘 가늠해서 공원에 가봐야겠어요. 고마워요. 응?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요? 음, 눈뜨고 꾸는 꿈 같아. 근데 이 전화가 닿았다는 것부터 안 믿기는데. 정말 꿈, 아니에요?


저는 잘 지내고 싶어요. 그 소망만은 아주 또렷해요. 근데 잘 모르겠어요. 아까 마음이 떠나가는 뒷모습에서 곰팡이 자국을 봤었던 것 같아요. 그 자국은, 저는 정말 죽고 싶다기보단 미친 척 혼잣말 중얼거리며 현실을 마음껏 부정해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 자국은, 정말 포기하고 싶다기보단 잘 못 지내는 저를 모른 척 방치하고 싶었던 거예요. 잠깐만이라도요. 벗어나고 싶어서. 나를 부정하고 방치해서 숨통을 틀 수 있다면, 이건 잘 지내는 걸까요? 이런 방식의 생존은 괜찮은 건가? 저는 정말 그런 마음이었던 걸까요?


잠시만요(수화기를 귀와 어깨 사이에 끼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돌 말린 전화선을 최대한 펼쳐 당겨 서너 걸음 걸어가 책장으로 간다. 두께와 지루함이 백과사전을 닮은 것 아무거나 집어와 앉았던 자리로 돌아온다). 책을 봐보려고요. 뭔가 답을 찾으려는 건 아니고, 지금 머릿속이 좀 복잡해서… 좀 숨고 싶어서… 그래서 가장 어려운 것으로. 가장 난해한 것으로. 의미를 알 듯 말 듯. 목소리를 알 듯 말 듯한 책을 골라 왔어요. 잠시만요 아무 데나 펼치면 되거든요(말없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사륵사륵 종이 넘기는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수화기 너머의 그를 잠시 잊었다.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 문장을 찾았다. 억지로 끌고 나온 눈빛으로 문장을 닳도록 읽는다. 닳고 닳아서 무슨 글자를 읽는 건지 보면서도 자각하지 못할 즈음이 되면 어지러운 기분으로 고개를 치켜든다. 눈빛을 잃은 기분이다. 텅 비어버린. 눈.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그런 기분이다. 돌연 이런 독자는 어떤 작가든 참 싫어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안하네… 이런 방식의 생존은 괜찮은 건가? (죄책감이 느껴져서 괜한 말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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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 너머 차분한 목소리가 일정한 간극 두며 나를 호명한다. 그가 언제부터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 미안해요. 잠깐 기분이 이상해져서… 마음 말고 다른 얘길 해 달라고요? 아무거나? 음…며칠 전에 시 수업을 듣고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속버스를 탔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어슴푸레한 저녁 하늘이 좋아서 버스에서 내리기 싫다고 생각했었어요. 그 있잖아요. 그림자마저 사라진 애매한 푸른빛. 왜 내리기 싫었냐면… 그냥, 거기서 보는 저녁 빛이 왠지 좋았어요. 그게 못내 기뻤던 것 같아요. 그냥, 정말로. 기뻤어요. 좋았어요. 진심으로. 엉덩이 아프고 종아리 퉁퉁 부어 더 앉아 있기 싫어질 만큼 버스 자리에 앉아서 저녁 하늘만 눈에 담고 싶었어요. 까만 어둠이 되지 못한 밤이 머금은 색채는 여름밤의 비밀스러운 영화였어요. 네, 정말로요. 네? 음, 마음. 그때의 그 마음은… 좋은 마음이었어요. (침묵) 맞다, 그리고 창밖을 보는 동안 언제든 숨어들어 갈 수 있는 달팽이 껍데기를 등에 달고 다니고 싶단 초라한 마음도 발견했었어요. 아마 그 늦저녁의 버스는 제가 찾던 아늑한 껍데기였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침묵)

그랬던 것 같아요.

영화는 너무도 찰나였고

밤마저 완연한 어둠이 되면

나는 여전히 어슴푸레한 외로움이었어요.

음, 네.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지내요.


조금 궁금한데. 당신은 잘 지내요? 이번에는 얘기해 줄 거예요?


1. 2024. 여름.

 

 

 

[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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