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당신을 꿈꾸게 하는 뮤지컬, '일 테노레(IL TENORE)'
-
조선 최초 오페라 테너 이야기
이탈리아어로 '테너'를 뜻하는 뮤지컬 <일 테노레> (IL TENORE)는 지난 5월 19일을 끝으로 초연을 성료했다. 국내 창작 뮤지컬의 위상을 또 한 번 증명한 <일 테노레>는 조선 최초 오페라 테너 이야기로, 한국 오페라의 선구자인 테너 이인선(1907~1960)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
이인선은 일제강점기 시절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의사이자 오페라 가수를 겸업한 인물이다. 그는 1948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단 '조선오페라협회'를 창단함과 동시에 한국 최초의 전막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춘희)'를 공연했다.
실제로 앙코르 공연이 이어졌던 '라 트라비아타(춘희)'처럼 <일 테노레>는 2023년 12월, 예술의 전당 CJ 토월극장에서 초연된 후 2024년 3월,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연장 공연을 올렸다. 한국적인 색깔을 지닌 대극장 창작 뮤지컬 <일 테노레>는 2018년 우란문화재단 개관축제 '피어나다'에서 상연된 낭독회로부터 출발했다. 이후 오디컴퍼니에서 판권을 구입하며 더욱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발돋움했다.
박천휴 작가X윌 애런슨 작곡가 콤비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
<일 테노레>는 오디컴퍼니의 라이선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처럼 이룰 수 없는 꿈이라도 포기하지 않는 열렬한 의지를 보여준다.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어쩌면 해피엔딩>과 같은 스테디셀러 작품을 탄생시킨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 콤비가 무려 네 가지 버전에서 시작해서 거듭 수정을 거쳤을 정도로 큰 노력을 기울인 작품이다.
대학 시절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던 윌 애런슨은 19세기 오페라 스타일을 바탕으로, 뮤지컬의 감정과 분위기에 맞는 곡을 새롭게 작곡했다. 특히 같은 멜로디가 다른 곡에서도 반복되면서 전체적인 연결성을 지니도록 했다. 이와 같이 전통 클래식 정서를 바탕으로 섬세하면서도 격정적인 넘버들이 현악기 중심의 18인조 오케스트라 연주로 펼쳐진다.
한 인터뷰에서 "난폭한 세상에서 꼭 이루고 싶은 개인적인 꿈이 있을 때, 그것의 아름다움과 비극을 동시에 담고 싶었다."라고 말한 박천휴 작가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에 짓눌린 청춘들의 찬란한 순간과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하며, '꿈의 무게'에 대한 진중한 메시지를 던진다.
시놉시스
일제강점기 경성. 항일운동 모임인 '문학회' 멤버들은 점점 심해지는 총독부의 검열을 피할 방법을 찾던 중 뜻하지 않게 이탈리아 오페라 공연을 계획하게 된다. 침략에 맞서 싸우는 베네치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 'I Sognatori - 꿈꾸는 자들'이 경성 시민들의 항일정신을 고취할 것이라 기대하며, 이 낯선 '서양 창극'을 공연하기 위해 뭉치는 사람들.
그 중심엔 자신도 몰랐던 특별한 테너의 목소리를 가진 의대생 윤이선, 지금 경성에서 가장 영민한 리더이자 연출 서진연, 자칫 위험할 정도로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이자 무대디자이너 이수한이 있다.
하지만 점점 뜻하지 않게 흘러가는 상황 속, 이들의 '조선 최초 오페라'는 무사히 공연할 수 있을까?
따스한 평행선 사이에 놓인 인물들
<일 테노레>는 주·조연과 앙상블을 가리지 않고 각자의 서사와 성격을 뚜렷하게 품고 있다. 가장 중심에 있는 세 인물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독립운동가 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의대생이 아닌 세계적인 오페라 테너로 성장하는 '윤이선'. 그는 평소에는 툭하면 사과할 정도로 소심하지만, 오페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뚝심 있는 자세를 취한다. 매일 끊임없이 연습하며 정상을 향해 도전하는 그는 단언컨대 한국 최고의 '일 테노레'다.
다음으로 당차고 똑똑한 문학회 리더 '서진연'은 오페라를 통한 항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앞장서는 인물이다. <꿈꾸는 자들>의 연출로서 다른 단원들을 전두지휘하는 그녀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전력을 다하면서도 주변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 책임감 넘치는 모습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냉정한 판단력을 가진 문학회의 무대 디자이너 '이수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간 부모님과 반대로 한국에 남아 무력 투쟁을 지지하는 행동력 강한 인물이다. 그 또한 홀로 고통을 떠안으려는 성격으로, 남겨진 이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진실을 감춘다.
독립운동 아래 본인의 목표를 실현하려는 세 인물의 조합은 기존 삼각관계의 공식을 벗어나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자 영감이 되는 따스한 평행선을 이룬다.
(왼쪽부터) 서진연, 이수한, 윤이선
극중극 오페라 <꿈꾸는 자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진연'은 널 생각하면서 노래한다는 '윤이선'의 사랑고백에 단숨에 화답하며 연인이 된다. 이후 왜 자기를 선택하지 않았냐는 '이수한'의 질문에 우린 너무 비슷해서라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그런 '이수한' 또한 깔끔하게 마음을 접으면서 두 연인을 위한 집을 만들어주겠다고 하는 아름다운 상황이 연출된다.
이러한 일직선에는 다른 인물들 또한 자리한다. 학생들의 잠재력을 발굴하면서 못다 이룬 꿈을 펼친 미국인 선교사 '베커 여사'나 골드레코드 사장으로서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겠다는 포부를 지닌 '최철'은 물론, 천재 피아니스트지만 사랑하는 연인에겐 한없이 약한 '춘배', 극중극의 여주인공 나탈리아 역을 빼어나게 소화한 '선화'까지 묵직한 파동을 던진 인물이 많았다.
꿈을 꾸던 시절로 이끄는 넘버
가장 대표 넘버라고 할 수 있는 'Aria Ⅰ: 꿈의 무게', 'Aria Ⅱ : 그리하여, 사랑이여'는 <꿈꾸는 자들> 속 안토니오 역을 맡은 이선이 온 힘을 실어 부른다. 젊을 적 찬연했던 꿈과 사랑을 노래하는 가사를 시점에 따라 점점 더 풍부한 감성으로 표현하며 깊은 울림을 준다. 여기서 극 전반에 걸쳐 리프라이즈되는 멜로디는 꿈을 꾸던 시절을 회상하도록 이끈다.
아울러 이선이 시험을 보던 중 상상 속 오페라가 펼쳐지는 '환상 오페라', 전 단원의 소리가 하나로 모이며 아늑하고 편안한 무대가 탄생하는 '작고 완벽한 세상', 이선과 진연이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폭발하는 '너라는 시간, 너라는 세상', 이선, 진연, 수한이 결전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는 '잘못된 꿈' 등 등장인물의 세밀한 심정을 담은 아름다운 선율의 넘버가 가득하다.
붉은 커튼으로 구분 짓는 두 가지 구조
첫째, 수미상관 구조로 노인이 된 이선과 진연이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출발한다. 이윽고 피날레에서는 오프닝 시점 이후로 전환되며, 노인 이선이 수한이 지어준 오페라 극장에 대한 연설과 함께 '꿈의 무게'를 노래하며 마무리된다. 따라서 청년과 노인을 구분 지어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된다.
둘째, 극중극 구조로 뮤지컬 <일 테노레> 속 오페라 <꿈꾸는 자들>의 전 프로덕션이 진행된다. 기획부터 대관, 연습, 리허설, 상연까지 모든 과정을 축약해서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이러한 장면 외에도 이선이 진연의 연출에 맞춰 연습하는 과정에서는 극중극의 주인공 '안토니오'와 '나탈리아'의 대역이 등장한다. 따라서 <일 테노레> 속 인물은 <꿈꾸는 자들> 속 인물과 동일시되며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때, 노인이 된 현시점 또는 극중극을 구분 짓는 요소는 '붉은 커튼'이다.
관객의 시선이 가장 집중되는 하이라이트 부분에서는 항상 커튼이 존재한다. 특히 이선이 오페라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담아 노래할 때 커튼은 그 의미를 효과적으로 부각한다. 뮤지컬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커튼이 열리고 닫히는 과정 속 존재하는 이선을 통해 그의 삶은 오롯이 무대 위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계속 꿈을 꿀 수 있도록
<일 테노레>의 단원들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저항 정신을 노래하는 <꿈꾸는 자들>을 공연하기 위해 노력한다.
먼저 아버지의 만류를 떨쳐내고 의대를 그만둔 이선은 골드레코드 오디션에서 우승하며 오페라를 올릴 극장을 마련한다. 이에 진연은 순탄치 않은 연습 과정에서도 모두를 독려하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 더불어 수한은 개막이 임박한 시간 동안 무대 바닥을 고치며 대의를 위해 나아간다. 다른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로 쉼 없는 연습을 통해 기량을 끌어올린다.
연극에 이어 학생 공연까지 반대하는 일본군에도 끝까지 방법을 찾아내어 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우렁차다. 빛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서도 각자의 꿈을 향해 돌진하는 과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의 눈물을 북돋는다. 한 명 한 명의 꿈이 모여 결국 모두의 꿈인 독립에 다가설 때의 소름은 형언할 수 없다.
"누군가는 계속 꿈꿔야지"라는 진연의 대사처럼, <일 테노레>는 관객들을 꿈꾸게 하는 극이다. 발단 과정에서는 그들의 꿈이 이뤄지길 염원하나 결말에 다다라서는 자신의 꿈 또한 이뤄지길 소망하는 마음이 자라난다. 바다 건너 이름 모를 인물이 아닌, 한국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으며 당신 또한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외친다.
화려한 성공이 아닌 눈부신 실패를 통해 누군가의 꿈을 싹틔우는 <일 테노레>. 환상적인 피날레가 다시 한번 울려 퍼질 날을 고대하며 마친다.
**사진 출처: 오디컴퍼니
[최수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