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정직하게 낡아가기 위하여

글 입력 2024.06.0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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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발 동원해가며 셀 수 있는 내 나이는 무게감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아 '나이가 들었다'는 표현이 잘 안 붙는다. 이제 허리께쯤 쌓인 나이는 올라설 수 있는 발판이었지 등에 져야하는 책임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이를 드는게 아니라 오히려 한살 한살을 밟고 튀어오르는 기분이라서, 나이들어감에 '어떻게'를 고민하는게 애먼일 같이 느껴졌다.

 

나이 들어간다는건 성숙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성숙해진다는 것은 내가 멋대로 설정한 절대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고 들어 어렴풋이 아는 것이고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언제라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옳고 그름, 필연, 당연, 숭고함으로 이름 붙였던 것들이 그냥 견출지에 써서 아무렇게나 붙여둔 것임을, 어떤 이름을 새로 써서 덮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머리로 이해하게 된다.

 

마음으로는 여전히 작고 안온한 내 세계에 머물고 싶다. 내 기준에 따라 재단해내면 되었던 일들이 지구 어딘가에 사는 누구누구씨에게는 겨울 나기에 꼭 필요한 옷감일까봐 판단을 유보하고, 이해하려 애쓰다 보니 화낼 줄도 모르고 크게 기뻐할 줄도 모르게 되었다. 이게 성숙해지는 것이라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면 조금 슬프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야만 한다. 내가 이들을 끝까지 이해 못할 것임을 이해하는 것, 그건 몸만 어른인 기형체가 되지 않기 위해서 품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다.

 

그럼 어떻게 나이들어갈 것인가. 정직하게 한살 한살 먹어가고 낡아가기 위해서 나를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내가 아는 나는 원체 쿨하지 못해서 일단 발을 들인일을 털어버리지 못한다. 매몰비용에 집착하는 성격이랄까. 그래서 처음 부터 맞는 옷을 입으려고 잴 수 있는건 다 재본다. 그렇게 맞춤 옷을 찾아서 그걸 업으로 삼고 싶다.

 

그런데 문득 내가 애호하는 것을 영 모르겠다. 그냥 얕은 관심을 그물처럼 펼처놓고 새끼 물고기가 잡히거든 돌려보내는 그런 식의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해서 음미해볼 만큼의 거대한 관심사를 만나지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숭덩숭덩한 그물로 다 빠져나가도 아무 말 못하는 미온의 상태라고. 비단 적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언제가의 사랑도 그러했다.

 

마케팅을 하자니 유행을 하나도 모르고 예술을 하자니 진정으로 공감할 수 없다는 자각이 들었다. 내용없이 형식만 좇기에 통달한 것 같은 느낌.

 

그래도 열심히 단서를 끌어모으고 있다.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님의 강연을 청해들을 기회가 있었다. '아, 내가 소위 자아실현을 통한 사회공헌에 경도되어 예술의 길을 꿈꾸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다름이 아니라 진짜 멋진 일이구나' 알 수 있었다.

 

나와 맞지 않는 옷을 판단하는 근거가 무지가 되어서는 안됐는데, 퀘스트를 해치우기 급급해서 여력이 없는 걸 관심도 없다고 오해한 것은 아니었는지 조금 반성도 하였다. 동류로 책도 좋고 글도 좋은데 그게 알파벳, 연산기호와 돈 보다 우선시 된적이 없다는게 양심이 찌르르했다. 이 조급함은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아는 이상 일상 속의 지연을 확보하는게 중요하리라. 현실과 이상이라는 선택지 사이에서 이제 우연을 믿는 수 밖에.

 

내가 가장 얻고 싶은 탁월함에서 멀어져만 가는 행보를 답습할때 마다 '아 그렇지, 난 항상 이랬지. 그래서 기회를 놓치고서는 그게 또 무마하면서 살아지니 그냥 살아가고 있는거지. 다 그렇게 살아간다는 걸로 위안을 삼고 싶지 않은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언젠가 나이가 멈추는 날까지 여전할 성장통인가 싶다.


 

 

임지영.jpg

 

 

[임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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