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런 방식의 구원이라면 - 뮤지컬 피에타

글 입력 2024.03.16 11:2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다수가 단 한 사람에게, 그야말로 압도되는 경우가 있다. 흔히 ‘카리스마’라고 부르는 그 감각이 찾아올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존경, 혹은 공포의 감정이다. 그렇다면 단 한 명의 배우가 공연을 이끌어가는 모노드라마의 압도감은 공연예술의 한 장르가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두 가지 방향의 마음일 것. 하나는 홀로 무대를 장악하며 관객의 마음을 헤집는 배우의 강인함에 대한 존경심, 다른 하나는 배우의 언어와 몸짓으로 되살려낸, 끔찍한 시대에 대한 공포감. 그 두 마음이 아름다운 방식으로 합쳐졌을 때, 우리는 그 압도감을 경외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을 테다.


약속의연극레퍼토리의 뮤지컬 <피에타>를 본다.

 

 

KakaoTalk_20240316_112332737.jpg

 

 

마리아(김사라)는 어린 아들과 함께 보내는 모든 시간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아들과 함께라면 모자를 둘러싼 세계의 고통을 기꺼이 견딜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마리아는 그녀가 사는 시대의 상황과 민족의 수난사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데, 그 세계는 가난한 자가 철저하게 가난하고 약한 민족이 고통스럽게 억압 받는 시대처럼 보인다. 물론 그녀의 이름 ‘마리아’가 말해주듯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놓인 이스라엘의 수난에 대한 이야기지만, 극의 모티프가 특정 민족의 역사를 중심으로 쓰인 성경에 있다는 사실을 가리고 본다면, <피에타>의 시공간적 배경은 약한 자가 억압 받는 보편적인 인류 역사의 재현이기도 할 테다.


따뜻한 봄날, 마리아는 불행한 시대의 그늘 속에 놓인 아들의 삶에 대해 고민한다. 아들이 현재의 억압에 조용히 순응하며 언젠가 도래할 자유를 막연히 기다리는 사람으로 자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의 불의에 맞서 싸워 영원한 자유를 쟁취하는 사람으로 성장해야 할 것인가. 전자는 불행하지만 안전하고, 후자는 희망차지만 위험하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물었던 질문에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는데, 종교적 예언에 따르면 이 질문의 대답은 정해져 있으며(‘그분’이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므로), 그 구원의 방식이 그녀의 아들을 통해서 이뤄지리라는 사실은, 적어도 ‘엄마’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들이 실현되면서 이 모자 이야기의 원형(「신약」)과 변형(<피에타>)은 갈라진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은 군중을 몰고 다니며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가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설파한다. 이 극에 몰입한 관객에게는 아들의 설교가 여러 결의 시선에서 읽히기 시작한다. 하나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종교적 시선. 수많은 인파 속에 우뚝 선 아들의 설교는 거룩한 ‘그분’의 말씀이 되어 기록되고 실현된다. 다른 하나는 먼발치에서 겨우 바라보는 모성의 시선인데, 이 간절한 시선은 아들에게 먼저 닿을 수 없으므로 슬프고 위태롭다. 마지막은 관객의 시선. 우리의 시선은 객석(위)에서 무대(아래)를 바라보는 시선일 텐데, 이는 하늘에서 땅을 보는 ‘그분’의 시선과 같은 선상이므로, 슬프지만 동시에 차갑다.


결국 마리아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야 한다. 민족의 구원만큼(혹은 그것보다) 사랑하는 아들의 안위가 절실했던 그녀는 절규한다. 그녀의 울분은 무고한 그녀의 아들을 죽이려는 기득권 세력들에게,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지도자인 아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힘없는 민족에게, 아들의 희생을 통해서만 구원을 주려는 냉혹한 ‘그분’에게 향한다. 어느 하나로 방향을 정할 수 없이 맴도는 원망. 이는 사회의 악에 의해 살인을 당한 아들을 둔 어머니의 절규와 같다. 실제로 예수는 종교의 창시자이자 성스러운 신앙의 상징인 동시에 역사 이래로 지속된 사회적 살인의 가장 유명한 피해자가 아닌가. 아들의 손과 발에 못을 박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세 차례 울리는 순간, 성모가 아닌 친모의 시선에서 성스러운 구원의 서사는 끔찍한 참사의 서사로 끝난다. 마지막 순간 배우의 몸으로 재현하는 ‘피에타’ 형상이 어떠한 거룩함도 없이 슬픔만 남은 덩어리처럼 보이는 것은 놀랍지 않다.


한 사람이 다수에게 압도되는 경우, 그 다수의 억압이 질서라는 명목으로 정당해져만 가는 경우, 그것은 언제나 끔찍할 테다. 권력을 쥔 한 사람이 다수를 억압하는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 우리는 역사로, 경험으로, 그 공포를 안다. 그러나 다수에 대한 어떤 한 사람의 압도가 무대를 사이에 두고 이루어진다면 분명 아름다울 수 있다. 공연예술은 본래 소수의 행위자를 통한 다수의 압도적 경험으로 풍족해지기 때문이다. 예수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추종 받는 카리스마적 인물이다. 그러나 뮤지컬 <피에타>는 예수를 생략한 채 어머니 마리아에 홀로 카리스마를 부여하며 무대를 기어코 경외라는 말로 번역해낸다. 종교적 압도감을 개인적 경외감으로 치환하는 데 성공한, 이토록 정당한 신성모독이 있다.

 

 

 

컬처리스트 명함.jpg

 

 

[차승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