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파리의 식물원에서 (1) [여행]

2023년 7월 5일, 프랑스 파리
글 입력 2024.01.3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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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낭만은 어디에 있을까? 왜 그토록 수많은 사람이 파리를 방문하는 것일까? 아직 찾지 못한 채로 멍하니 침대 위에 떠 있다. 지금 나의 여행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모두가 나가고 홀로 남겨진 호스텔 안. 오전 8시. 베개 옆에는 어제까지 같은 방에서 지낸 어느 한국인 교수님의 명함이 놓여 있다. 아침 일찍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신 모양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구름 한 점이 없다. 유럽에 온 이래로 흐리든 맑든 늘 구름이 있었는데. 파리는 쌀쌀하다. 창문을 열고 가늠해 보는 온도는 거센 겨울이 일단락되고 봄이 오려는 그것과 같다. 여름을 기대하고 유럽에 왔건만 역시 모든 건 예상대로 되지 않는다. 다시 되새기는 여행의 마음가짐. 낭만은 여행이 선사하기보단 내가 만들어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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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몸소 깨달았다. 나는 파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7월 5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찬찬히 돌이켜보자면...
 
첫 번째 기억은 오전 9시가 넘은 시간. 슬렁슬렁 밖으로 나왔다. 프랑스의 빵을 먹고 싶었다. 내가 가진 유일한 파리의 낭만은 바게트. 숙소 근처 빵집에 들러 바게트처럼 생긴 긴 빵과 크루아상을 샀다. 기대에 가득 찬 마음으로 한 입 베어 물었는데 환상적인 정도는 아니었다. 버스를 타고 숙소 근처 뤽상부르 공원으로 향했다. 정원에 깔린 의자에 앉아 긴 빵을 씹었다. 오래 앉아있을 생각이었지만 날이 쌀쌀해 금방 발걸음을 옮겼다. 근처 판테온도 들렀다. 카페에 들러 카푸치노도 사 마셨다. 세트 메뉴를 시켰던 건지 뺑오쇼콜라도 함께 받았다. 이건 환상적이었다. 산책하다가 서점에 들르고 고양이도 보았다. 길거리 플리마켓을 구경하고 공사 중이던 노트르담 대성당도 지나쳤다.

파리에 왔으니 유명하다는 명소들도 들러볼까 싶은 마음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퐁네프 다리가 보였다. 군 복무 시절 보았던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촬영지가 내 눈앞에 있구나. 파리에 와서 처음으로 설레어왔다. 주인공들이 앉아있던 곳에 나도 앉아보았다. 내 앞으로 차가 지나갔고 사람이 걸어 다녔다. 그리고 에펠탑. 파리에 왔으니 에펠탑은 봐야지. 지하철을 타고 에펠탑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웅장했다. 날이 맑았고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사진 속 나는 웃고 있었고 사람들도 행복해 보였다. 나 정말 파리에 있구나. 에펠탑을 실제로 보았구나. 그리고 단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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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처음이라 낯설지만 누구에게나 익숙한 도시.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돈은 없었고 끼니를 때우려 마트에 들러 요거트와 음료를 샀다. 숟가락이 없어 요거트를 들이부어 마시며 내 앞에 놓인 텅 빈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점심과 저녁 사이 어중간하게 걸쳐 있는 오후였다. 숙소로 돌아가기도 일정을 시작하기도 애매한 시간. 나는 이러려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건가. 유명하다는 몇 군데를 돌아보고 나도 하루는 끝나지 않았고 나는 파리의 모든 것을 감흥 없이 통달한 기분이 들었다. 파리에 왔으니 응당 그래야만 하는 것 같은 느낌에 휩쓸려 에펠탑 바로 앞 잔디밭에 주저앉았다. 불쾌할 만치 토독토독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건 내가 원하던 게 아니야. (심드렁한 표정으로)

 잠깐, 이쯤에서 떠나기 전 남긴 다짐을 다시 읽어보자. (갑작스럽고 경쾌한 내레이션)

 

 
그곳에서만큼은 순수해지고 유치해지고 싶다. 내가 즐거운 것이 즐겁고 나의 발견만이 유일한 발견이며, 지금 이 느낌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느낌일 것이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서 보고 듣는 것 하나하나에 감탄하고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이끌리는 대로 행할 것이다. 이렇게 나의 고유함이 만들어질 것이니. 통상적이고 관습적으로 여행하지 말자. 지금 나는 당장 내가 여행지에 도착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을지 전혀 감이 안 오는 상태인데... 이 느낌 좋다. 쫄리면서도 아주 설렌다. 오랜만이다. 낯선 곳. 신비한 인연. 모든 가능성. 코 앞이 될 그간의 아득한 상상.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 – 나는 파리에게 무엇을 바라나. 정해진 선약이 있어 파리에 왔건만 그마저도 내가 원한 것이었나. 무엇을 해야 할지 정말이지 감이 잡히지 않는데 어떡하나. 하루 정도는 관광지를 둘러보자는 나의 판단이 잘못이었던가. 이런 생각들을 하며 다음 행선지를 떠올리려 애썼다.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유럽에 왔기에 나는 움직일 의무가 있었다. 내가 유럽에서 기대했던 것들은 베를린에서 이미 다 충족한 것만 같았다. 파리는 내게 너무 관광지 같았다. 관광의 활성화를 위해 치밀하게 조직된 계획도시 같았다. 관광지들만 잘 다듬어져 있고 일상을 사는 구역은 거칠고 투박해 보였다. 길거리와 지하철에서 지린내가 진동했다. 물론 이건 나의 편견이고 파리는 언제나 파리일 뿐이었대도. 나는 도심과 마음속을 번갈아 들락거리며 여행의 이유와 낭만을 찾아 헤맸다. 초점 없는 시선으로 에펠탑 인근을 서성거리며 구글 맵을 켜고 끄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베를린에서 읽은 책이 생각났다. 한국에서 가져온 책들 중 하나에서 파리에 위치한 식물원이 언급된 글이 있었다. 벤치 하나에 자리 잡고 온종일 앉아있어도 좋았다는 내용이었다. 파리에서 정말 갈 곳이 없다면 가보리라 생각했다. 그런 상황을 바라진 않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적절한 타이밍이 찾아온 듯했다. 지하철을 타고 식물원으로 이동하려 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운행하지 않았다. 대신 지하철 안내원이 손수 다른 경로를 적어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63번 버스를 탔다. 파리 시내를 일자로 가로지르며 버스는 달렸다. 누군가는 동선 낭비라고 질책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건 오늘의 유일한 이끌림이었다. 버스에서 내렸고 눈앞에 놓인 커다란 철문에는 금색 글씨로 ‘Jardin des plantes'라고 쓰여있었다. 그 안으로 나는 기꺼이 들어섰다. 그 끝없고 안락한 세계로.
 
(계속)
 
 
[문충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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