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세 번째로 필름 카메라 수리를 맡기며

필름 사진 찍기는 상처와 회복의 반복
글 입력 2023.10.2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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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2021. ⓒ류나윤

 

 

포기의 미학이라는 게 있다고 믿는다. 안 되는 것을 계속 붙잡고 있지 않고, 어떨 땐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중요한 무언가를 과감하게 포기한 경험이 몇 번 있었다. 아마 더 남아있었다면 당연히 그에 따른 좋은 결과도 있었을 것이지만, 포기했다는 사실에 수치를 느끼거나 후회한 적은 없다.

 

내가 끈기라는 게 좀 없는 사람이다. 한 자리에 앉아서 공부나 일 따위를 잘 하는 사람을 뜻하는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라는 말의 정반대에 있는 사람이 나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시작의 설렘이 있다. 아주 많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보람찬 끝맺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며 인정하고 받아들인 나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필름 사진을 찍는 건 나를 스쳐 간 수많은 취미 중에서도 쉽게 잊히거나 포기되지 않고 꽤 오래 살아남았다. 어떡하지? 벌써 한 십 년이 되어 간다. 내가 십 년 가까이 한 가지를 놓지 않고 하고 있다니. 참 희한하다.

 

 

 

상처


 

왜냐하면 필름 카메라는 돈도 많이 들고 손이 많이 가서 악명이 높은 취미이기 때문이다. 노력과 돈이 정~말 많이 든다. 투자하는 것에 비해 결과는 꼴랑 서른 여섯 컷 필름 롤 하나. 무거운 카메라 들고 다니느라 고생해서 목에 걸리는 담과 손목의 뚜두둑 소리 정도?

 

그마저도 잘못 찍어서 통째로 날려버릴 가능성이 제법 있다. 지금이나 예나 필름 사진에 입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매뉴얼은 항상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글들을 보면 ‘필름 초보가 저지르는 실수’가 대략 35가지 정도 나열되어 있다. 그거, 진짜로 다 일어나는 일들이다.

 

필름 감도를 잘못 맞추어 새까만 사진 앞에서 머리를 긁적이는 것은 물론, 필름이 감기지 않은 채 신나게 셔터를 눌러대서 아무 것도 없이 반짝거리기만 하는 새 필름을 주시며 안타까워하는 현상소 사장님의 얼굴을 보는 건 대략 3회 정도 해야 정신이 차려진다. 제일 기억에 남았던 건 베트남 여행을 떠나기 전 새로운 필름을 넣겠다며 해맑게 카메라 뚜껑을 열어버린 것이었다. 그건 뭐랄까, 남이 씻고 있는 샤워실 문을 활짝 열어버린 것만 같이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경험이다. 그 내용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까지 고려해서 말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찍는 동안에도 햇빛, 피사체와의 거리, 그날의 무드(?) 등을 고려하며 세밀하게 사진 촬영 데이터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입력하는 것이 사실 필름 사진 찍기의 가장 민감하고 어려운 부분이다. 실패하면 안경을 벗고 길을 활보하는 것과 같은 시야를 얻게 된다. 애매하게 뒷배경에서 길을 건너던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기묘한 경험을 할 때도 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상처를 입게 된다. 내 돈, 내 추억, 내 기억, 내 개고생… 그래서 나는 곧잘 필름 사진을 잔뜩 찍어대다가 갑자기 카메라에 손을 안 대는 때가 많다. 필름에 상처를 받은 것이다. ‘포기의 미학 vol.2’ 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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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2023. ⓒ류나윤

 

 

 

회복


 

보통 이런 상처의 시기가 오면 내가 찍은 사진들에 대한 결과물이 더 이상 궁금해지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필름은 자연스레 어디 보물 상자나 방에 있는 애매한 서랍장에 들어가게 된다. 사진을 찍던 날의 기억은 흐려지고, 내 방 속에 남은 필름들의 위치도 점점 내 머리에서 사라진다.

 

그러다가 진짜 뜬금없이, 그 필름들이 내 눈앞에 나타날 때가 있다. 그냥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필름이 눈에 들어왔다거나, 어디 서랍을 열었는데 공간 깊숙한 곳에 숨어있어야 할 애가 굴러 나왔다거나. 그럼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내가 여기에 뭘 찍었더라?

 

혹시나 더 있을지도 모르는 필름들을 찾아 방 곳곳을 뒤진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나오는 편지 따 따위 정신이 팔리는 것도 이 회복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단계이다. 그렇게 찾다 보면 대충 5~6롤 정도가 나온다. 여기서 나올 사진만 해도 최소 180장이 아닌가. 대박!!

 

현상을 맡기고 현생이 바빠 정신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면 결과가 나와 있다. (항상 예정 날짜보다 빠르게 작업 해주시는 현상소 사장님께 감사하다) 스캔 된 이미지 파일을 열기 직전, 폴더에 접속하는 그 시간이 가장 떨리고 가장 망설여지는 시간이다. 결과물에 따라 또! 망한 필름을 만들어 버린 나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너무 아름답게 기록된 추억에 감동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둘 사이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눈을 딱 감고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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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빌론> 스틸컷.

 

 

모니터를 꽉 채우는 아날로그 사진이면 영화 몽타주에 감동해 우는 영화 속 주인공의 심정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수년이 지난 경험을 다시 눈앞에 불러오는 경험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게 포장된 장면을 만끽할 수 있는 경험이기도 하다. 어떨 땐 진짜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게 너무 잘 드러나는 사진도 있어서, 아름다운 슬픔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런 걸 볼 땐 정말 게임 캐릭터처럼 순식간에 회복되는 느낌이 든다. 사진을 찍을 때 함께 했던 친구들에게 공유하는 것까지가 회복의 마지막 단계. 이러면 필름 사진을 찍을 맛이 좀 난다.

 

이번엔 잘 쓰지 않던 미니카메라를 수리 맡겨 놓았다. 다음 주엔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서너 배는 뛰어 버린 필름 값과 날이 갈수록 오르는 현상 비용이라는 장벽에 아마 또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러다가 또 방구석에서 필름을 발견하겠지? 그리고 또 사진 속 아름다운 추억들에 눈물을 흘리겠지? 그래서 또 혼자 필름 사진을 찍으러 길을 나서겠지?

 

 

왜 아직까지 필름 사진을 찍고 있는지를 다시 납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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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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