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반짝이는 바다 너머, 라울 뒤피의 진짜 얼굴 - 이것은 라울 뒤피에 관한 이야기

글 입력 2023.09.0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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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가까이 사는 사람들을 동경한 적 있다.

 

마음이 무거워질 때마다 자주 바다에 기댔기 때문이다. 터덜터덜 바다에 버리고 오는 마음이 많아질수록, 몇 걸음만 걸으면 바다에 도착하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 수 있다면 보다 넓고 여유로운 사람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상상이었다. 


주위에 여러 이유로 바다 근처를 맴도는 사람들이 있었다. 천성인지, 아니면 바다를 계속 지켜보다 그 마음을 닮은 것인지. 그들에겐 쉽게 사람의 마음을 풀어헤치는 재주가 있다. 바다에 갈 수 없는 날엔 사람에 기댔다. 살아가는 내내 망망한 바다와 그를 닮은 이들에게 빚진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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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풍경으로 시작하는 이 책의 화가 역시 그렇다. 투명하고 결이 드러나는 붓질은 바다 물결을 닮았다. 경쾌한 색조는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마음이 트이는 그림. 이 화가의 이름은 라울 뒤피다.

 

 

 

1. 라울 뒤피


 

 

"유년기에 나를 키운 것은 음악과 바다였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곳, 또는 눈부신 물결의 움직임을 조금도 느낄 수 없는 곳에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호수 정도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라울 뒤피

 


뒤피는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다 곁에 오래 살았으며, 바다를 자주 그린 화가다. 그가 태어난 바다는 프랑스의 유명한 항구 도시 르아브르.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의 배경이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뒤피는 육지를 떠나 저 너머로 항해하는 배들부터, 선원들, 치열한 요트 경주의 풍경, 바다 근처에서 행복한 휴가를 보내는 사람들까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다채로운 삶의 순간들을 펼쳤다. 그래서 뒤피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푸른 이미지가 떠오른다. 실제로도 뒤피는 파란색을 좋아했다고 한다. 아내의 사랑스러운 자화상의 배경에도, 바다가 아닌 숲의 풍경에도 푸름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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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파란색은 라울 뒤피와 거의 동일어일 것입니다." 

 

jan, 랭커스터, 『라울 뒤피』, 1985, 5p

 

  

뒤피의 그림은 생동감 있다. 바다에 그려진 뾰족한 표시에선 끊임없이 넘실거릴 파도가 상상된다. 사람이 등장하는 그림 역시 그렇다. 그가 그린 뭉툭한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 같다. 투명한 배경을 지나 그들만의 이야기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리듬감 있는 선과 색면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겹쳤던 흔적이 남은 것처럼, 일시적인 실루엣으로 느껴진다.

 

 

"실루엣은 모양이 아니라 움직임이다."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에 보관된 뒤피의 노트 23, Folio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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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것은 라울 뒤피에 관한 이야기


 

슬픔보다는 행복을 그린 화가. 파란색을 유독 좋아했던 뒤피를 돌아보는 책. 이것은 이소영 작가의 책 <이것은 라울 뒤피에 관한 이야기>에 대한 글이다.


간결한 제목대로 책은 라울 뒤피의 모든 삶과 이야기를 되짚는다. 현재 서울에서 뒤피의 전시가 두 곳이나 열리고 있지만, 사실 뒤피는 한국에서 잘 알려진 화가가 아니었다. 작가는 라울 뒤피가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에 자극받아 책을 썼다. 전작에서 꾸준히 아직 널리 소개되지 않은 예술가를 알리던 다정함이 이번에도 이어진다.


뒤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았다. 색채의 마술사, 큐비즘의 대가, 인상주의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쉽게 따라붙지 않는다. 그것은 뒤피가 하나의 길만을 걷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여러 갈래로 놓인 길을 옮겨 다녔고, 길과 길 사이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 걸었다.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를 참고한 특유의 화풍에 그림과 디자인, 벽화, 도자기 등 매일 새로운 작업에 도전하며 살았다.


책은 그런 뒤피를 일대기적 구성으로 보여주기보다 그를 읽어낼 수 있는 다양한 조각을 제시한다. 뒤피의 삶부터 작품 스타일, 주변 사람들, 다양한 직업은 물론 뒤피의 말과 뒤피를 설명하는 말이 교차한다. 원하는 이야기를 쥐고 뒤피의 세상을 항해하는 것이 이 책의 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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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 작가는 '위대한 예술가는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를 둘러싼 것들은 무엇이 있었을까. 가장 먼저 영감의 원천이었던 바다가 있을 것이고 그다음엔 뒤피 스스로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그가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도운 수많은 사람들도 함께 있었다.


어릴 적부터 뒤피가 예술적 삶을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부모님과 또 다른 화가였던 동생 장 뒤피. 그의 작품을 처음 사고 세상에 알린 갤러리스트, 동료 예술가들, 그를 지지한 컬렉터. 이소영 작가는 흔히 조명하지 않는 이들까지 섬세히 훑어낸다. 작가의 말처럼 예술가는 진공에서 태어나지도, 홀로 완성되지도 않는다. 위대한 예술가가 탄생하고, 성장하고, 역사에 남는 것은 여러 이들의 공동작업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3. 뒤피의 진짜 얼굴


 

뒤피의 그림은 너무 행복하기에 현실이 아니라 동화 속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둡고 추악한 세상은 보지 않았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토록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일까?

 

이소영 작가는 그림 뒤, 우리가 몰랐던 그의 얼굴 역시 비춘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마냥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목격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했던 고향은 전쟁 중 많은 피해를 입었다. 뒤피는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하고 있던 시기, 독일 정부가 자신을 전시 오프닝에 초청하자 거절하고 작품을 파괴하기도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행동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뒤피는 의도적으로 행복한 그림을 그린 화가가 된다.

 

 

"삶은 나에게 항상 미소 짓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삶에 미소 지었다."

 

라울 뒤피

 

 

힘든 상황 속에서 미소 지으려 노력한 뒤피의 의지가 느껴지는 말이다. 결국 그의 그림은 우리가 생의 아름다움을 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을 건네는 듯 하다. 찬란한 아름다움 너머, 절망 속에서도 삶의 기쁨을 잃지 않으려던 그의 의지를 읽게 된다.


뒤피의 다양한 작업을 살펴보면 그는 예술가로서도 항상 고민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변화하고 시도한다는 것은 매 순간 고민에 놓였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는 어쩌면 매일 아침 일어나,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다짐하고 작업을 시작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뒤피는 걱정과 고민이 끝나지 않는 예술가의 삶이 비극이라 말하기도 했다. 이소영 작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이룬 수많은 창조는 자신에 대한 확신보다는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기 위해 더욱 성실하게 매진한 과정일 것이다.

 

 

불확실함을 견디고 도전하는 마음의 어려움을 우리는 알고 있다. 뒤피의 그림 속에 그런 괴로운 마음들이 깃들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캔버스 뒤, 뒤피의 다양한 얼굴을 상상하게 한다.


책을 덮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뒤피의 얼굴을 알 수 없다. 그가 어떤 순간에 어떤 고민을 했으며,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궁금해 할 뿐이다. 뒤피에 대한 조각을 하나 쥘수록 그의 그림은 다르게 느껴진다. 다정한 안내자 이소영 작가와 함께, 매번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그의 그림에서 뒤피의 여러 얼굴들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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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된 대사는 모두 책에 있는 내용으로, 재인용함을 밝힙니다

 

 

[최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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