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절개가 아닌 지조를 지키리 - 춘향: 날개를 뜯긴 새 [공연]

글 입력 2023.05.2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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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기생의 딸 춘향이 남원 부사의 아들 이도령과 사랑에 빠졌더래요. 이도령이 서울로 떠나게 되자 둘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지요. 어느 날, 새로 부임한 사또가 춘향을 불러 수청을 들라 명했어요. 그러나 춘향은 이몽룡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그를 거절했죠. 아- 딱한 춘향. 옥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렸더래요. 그때 이몽룡이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나 탐관오리였던 사또를 파직하고 춘향을 구했어요. 이몽룡은 춘향을 정실부인으로 삼아 둘이 백년해로했더래요.”

 

누구나 알고 있을 <춘향전> 이야기다. 판소리계 소설이 널리 사랑받으며 창극, 현대소설,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이를 이어 국립정동극장 예술단은 연희와 무용을 접목한 ‘춘향: 날개를 뜯긴 새’ 공연을 올렸다. 미디어아트와 시대적 배경에 대한 자막 설명, 그리고 춘향의 심정을 들려주는 내레이션 등의 직관적인 요소가 한국무용의 깊고 추상적인 표현과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또한 사물놀이와 상모돌리기와 같은 전통예술은 <춘향전>에 녹아 있는 한국적 정서를 형상한다.

 

 

춘향 컨셉 포스터 MAIN fin 0406.jpg


 

‘춘향: 날개를 뜯긴 새’ 제목은 제법 직관적이다. ‘춘향’의 일인칭 시점으로 재해석돼 그의 주체성이 드러나고, ‘날개가 뜯긴 새’에서 그녀가 자유를 갈망하나 외부적 요소가 이를 좌절케 했음을 알 수 있다. 춘향은 이몽룡 또한 ‘날개가 없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따라서 이 공연에서의 관전 요소는 ‘춘향의 주체성이 어떻게 날개로 표현되는가?’, 그리고 ‘이몽룡은 그녀의 주체성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이다. 춘향의 시점인 만큼 상황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플래시백 기법이 쓰여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국립정동극장] 춘향 날개를 뜯긴 새_ 공연사진 (1).jpg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낀 순간부터 나에겐 자유가 없었다.” 기생의 딸로 태어난 춘향은 자유로이 훨훨 춤춘다. 타악기의 소리에 맞춰 진동하는 미디어아트는 그녀의 움직임과 함께 자유롭게 퍼져 나간다. 그러다 춘향의 날개가 뜯긴다. 춘향의 엄마 ‘월매’는 날개가 뜯겨 덜덜 떨고 있는 춘향을 가만히 안아줄 뿐이다. 변사또가 부임해 그녀에게 수청을 들 것을 명하지만 춘향은 이를 거절한다. 새로운 권력의 복종에 응하지 않은 춘향은 가차 없이 처벌받는다.

 

다만, 춘향의 시점인 만큼 그녀의 고통은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 재현 방식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긴장감 넘치는 무용과 동선 이동으로 이뤄진 밀도 높은 연출 장면이었지만, 변사또와 마주 보고 앉아 춘향의 고통을 관음하는 방관자가 된 듯 느껴지기도 했다. 시련 서사를 겪는 춘향의 모습이 표현될 필요는 있지만, 고통받는 여성의 모습이 수차례 구체적으로 묘사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남는다.

 


[국립정동극장] 춘향 날개를 뜯긴 새_ 공연사진 (5).jpg

 

 

일 년 전으로 돌아가 춘향이 이몽룡과 만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날개를 뜯긴 후 자유를 갈망하던 춘향 앞에 똑같이 날개가 뜯긴 몽룡이 있다. 춘향은 신분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이몽룡은 권세 있는 집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제약을 받아왔다.

 

날개가 뜯긴 이유는 각자 다르지만 둘은 서로의 결핍을 알아보고 사랑에 빠진다.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하얀 사랑을 키우지만, 이몽룡은 검은 바람에 쓸려 가버린다. 흰옷을 입은 둘과 대비되는 검은 바람은 수시로 바뀌는 대형으로 표현된다. 기약만 간직한 채 춘향은 홀로 남았다.


춤추기를 거부하고 무릎 꿇은 춘향 앞에 월매가 나타난다. 월매는 그녀를 대신해 사또 앞에서 춤을 춘다. 자신의 신분 때문에 날개가 꺾인 춘향에 대한 죄책감일까. 혹은 엄마가 험한 일 다 할 테니 넌 하지 말라는 모성의 표현일까.

 

죽음이 춘향의 얼굴에 깃든다. 그러나 그녀는 ‘나로 죽을 수 있으니’ 괜찮다고 되뇐다. 여러 차례 처벌을 받으며 죽음과 가까워진다. 그럼에도 춘향은 ‘나’로 죽겠다며 지조를 지킨다. 격정적인 음악과 천을 이용한 무용은 춘향의 몸을 조여오고 짓밟는다.

 

 

[국립정동극장] 춘향 날개를 뜯긴 새_ 공연사진 (7).jpg

 

 

그때, 이몽룡이 들어선다. 춘향이 춘향으로 살 수 있게 해줬던 사람이다. 이몽룡은 춘향을 변사또로부터 구해내고, 둘은 다시 날개를 회복해 활짝 편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훨훨 하늘을 난다.

 

춘향의 주체성은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춘향전을 연애 소설로 본다면 춘향의 수청 거절은 절개를 지키는 ‘열녀’로서의 행동이다. 그러나 이를 춘향이 ‘지조’를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본다면 수청 거절은 그녀의 몸에 대한 권한을 쥐고 있는 행위다.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차라리 ‘나’로서 죽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여성 주인공의 행위 동기를 ‘사랑’으로 한정 짓지 않고 자기 몸에 대한 선택과 신념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춘향의 주체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왜 이몽룡을 만난 후에야 그녀는 날개를 다시 펼칠 수 있었을까? 이몽룡을 조력자로 본다면 어느 정도 춘향의 ‘주체성’을 이해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 분석에 따르면 춘향은 ‘자유’라는 대상을 변사또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되찾게 되는 결정 시련을 겪는다. 비록 홀로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이몽룡이라는 조력자를 통해 자유를 되찾으며 날개를 펼치게 되는 것이다.

 

이몽룡이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면 춘향은 그에 귀속되는 공주님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춘향은 그에 의존하지 않고 ‘춘향’으로 존재한다. 시대적 배경과 원작의 한계로 춘향이 ‘춘향으로’ 존재하는 방식이 의존적으로 비쳐 아쉽지만, ‘나로서’ 존재한다는 메시지에도 충분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

 

 

춘향.jpg

 

 

춘향은 이제 날개를 달고 어디든 날아갈 수 있다. 훨씬 자유로워진 세상에서 제약을 벗고 춘향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꿋꿋이 지조를 지키며.

 

 

[정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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