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집단을 개인으로 환원해 판단할 수는 없다. 그 구성원이 서로 흡사해 보이는 감정과 상황을 공유한다고 할지라도, 섣부른 일반화는 개별적인 자아 사이의 섬세한 간극을 메워버린다. 이때 그러한 오류 내지는 실수는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바라볼 때 종종 범해진다. ‘성(性)’이라는 문제는 사회 통념상 예민하게 다루어지기에 사건에 대한 공개적인 언급은 터부시되며 이는 피해자를 향한 이중적인 자세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들이 피해로 입은 상처를 과거의 기억에서 끊어내기 어려운 것은, ‘존엄성을 짓밟힌 무력한 피해자’라는 동정 어린 시선 때문일지 모른다. 그 출발은 일종의 배려였을지 몰라도 그 시선이 때로는 이들의 ‘피해자다움’을 은연중에 규정한다. 이 조심스러운 편견은 그들을 미디어에서 다루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쳐 드라마나 영화, 문학 작품에서 성폭력 피해자는 대부분 약자로서의 연약한 모습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만 그려질 때가 잦다.
그러나 사회적 병리를 문학으로써 날카롭게 짚어내는 대만의 작가, 우샤오러의 신작 장편소설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강초아 옮김, 한스미디어, 2022)는 통상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난 다층적인 성범죄 사건들을 촘촘히 구성해 독자로 하여금 그 본말을 추적하게 만든다. 이와 동시에 성폭력 피해자를 향해 지녔던 선입견과 도덕적 잣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소설가로서는 독특하게도 법학과를 졸업한 이력답게 성범죄 사건을 둘러싼 법적 기반과 사회적 배경을 탄탄히 묘사해 몰입감을 더한다.

이야기는 타이베이에 거주하는 변호사 판옌중의 아내 우신핑이 실종되면서 시작된다.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한 뒤 딸의 학원 선생님으로 만나게 된 그녀는 전처와는 달리 차분한 행동거지에 검소한 씀씀이를 갖춘 사람이었다. 속마음이라던지 과거사, 하물며 주변의 사소한 가십거리 하나 쉽게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불필요한 감정 소모보다는 좋은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바랐던 판옌중에게는 그녀의 그런 점이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문제 없이 직장 생활을 하고 딸을 돌봤던 아내가 갑작스럽게 연락을 끊고 잠적한다. 판옌중은 과거 전처와 이혼하며 가정폭력을 휘둘렀다는 언론 보도로 골머리를 썩혔기에, 이번에도 같은 문제를 우려해 직접 나서 아내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내의 직장을 시작으로 점점 그가 알지 못했던 비밀이 파헤쳐진다. 죽었다고 분명히 말했지만 살아있는 그녀의 부모님, 같은 아파트에 살 정도로 친했지만 남편에게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친구들, 고등학교 시절에 그녀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까지.
과거의 존재들을 자신의 삶에서 도려낸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판옌중은 우신핑이 유일하게 언급했던 지인인 젠만팅을 비롯한 그녀의 직장 동료들로부터 정보를 캐내 아내의 고향에 찾아간다. 존재조차 몰랐던 장모와 처남을 만나고 그녀의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게 된 그는 이 과정에서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한다. 바로 아내가 고등학교 시절, 절친한 친구였던 쑹화이쉬안의 오빠의 생일파티에서 강간을 당했다는 것.
우신핑이 이 사실을 함구했던 것은 성폭력 피해를 공공연히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건을 둘러싸고 퍼졌던 소문들이 의구심을 더한다. 가정 형편이 나빴던 우신핑이 거액의 합의금을 받아내기 위해 친구의 오빠 쑹화이구 사이에서 이루어진 합의하의 성관계를 강간으로 매도해 소송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피해 직후에도 쑹화이쉬안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눈 것을 학교 학생들이 보았다는 점, 합의금을 받고 나자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했다는 점 때문에 그 소문은 사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건에 더 가까이 접근할수록 그녀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남는다.
한편 우신핑의 친구였던 오드리 역시 사라진 친구를 찾아 헤맨다. 그녀는 과거 가정폭력을 저지른 남편 판옌중을 실종사건의 범인으로 의심하고 그의 뒤를 밟는다. 오드리는 초등학생 시절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선생님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성인이 된 후에도 정서적으로 방황하다 인터넷으로 우신핑을 만나게 되고, 같은 성폭력 피해자라는 동질감으로 그녀에게 깊이 의지하며 룸메이트로 지냈던 친구다. 오드리는 사건을 바짝 뒤쫓는 판옌중을 미행하면서 쑹화이쉬안의 존재까지 알게 된다.
이렇게 책은 판옌중이나 우신핑의 직장 동료인 젠만팅, 친구 오드리 등 우신핑을 제외한 다른 인물의 시선에서 서술된다. 그러나 우신핑의 시점에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이름 모를 여성의 이야기가 끼어든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나’로만 지칭되는 이 인물은 어릴 적 아버지의 외도를 알게 된 후로 자신마저도 어머니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속되는 아버지의 불륜과 점점 히스테릭해지는 어머니 틈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은 오빠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오빠는 그녀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가정의 불화 가운데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짊어지고, 늘 외로웠던 그녀를 감싸주었던 오빠를 향한 복잡한 감정은 그 상황을 용인하고 묵비하게 만든다. 이 뒤틀린 성장 과정에서 겪은 그녀의 심리적 불안은 단짝 친구에 과잉 의존하는 성향으로 이어진다.
과연 그녀의 정체는 누구일까. 성폭력에 노출된 환경, 그리고 오빠가 있다는 점을 미루어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우신핑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서는 화자의 정체를 우신핑으로 확신할 만한 단서가 없을뿐더러, 우신핑과는 달리 화자의 가정 형편은 유복하다고 묘사된다. 소설 중후반부에서는 그녀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모든 사건의 진상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신핑의 진실은 무엇이고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으며, ‘나’의 정체와 모든 사건의 결말은 어떻게 밝혀질까.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는 그루밍 성범죄를 통해 그 피해자들이 겪는 내적 혼란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루밍 성범죄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얻거나 돈독한 관계를 만드는 등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을 뜻한다. (pmg 지식엔진연구소, 시사상식사전, 2020) 아동 대상의 성범죄 중 절반 이상이 면식범의 소행임을 생각해 보면, 그루밍 성범죄의 위험성은 더욱 중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오빠는 나를 위로하고 보살폈다. 그러니까 오빠가 그중 한 가지를 도로 받아가겠다고 한다면 그건 전혀 잘못이 아니었다. 내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나 자신과 그 순간의 상황을 분리하기만 하면 생각보다 무서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꽃 모양으로 만들어진 전등 덮개를 주로 쳐다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나는 아까부터 꽃잎을 세고 있었을 뿐이야. 잠들 준비를 하면서 말이야. 나는 오빠가 좋은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다. 오빠는 이 집에서 누군가 자기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무언가 방법을 찾아낸 것뿐이다.”
우샤오러,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pp.328-329
“그녀는 린 선생님에게 집착했고, 린 선생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열 살이었던 오드리는 갑자기 너무 높은 의자 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자신을 거기에 올려놓은 사람만이 도로 내려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샤오러,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p.265
어릴 적의 미성숙한 판단능력, 그리고 가해자를 향한 의존과 친의로 벌어진 성범죄 이후의 감정을 묘사한 단락이다. 거친 폭력이나 강압, 육체적 저항 등 흔히 떠올려 왔던 성폭력의 피해 현장과는 사뭇 달랐다. 그럼에도 그 잔혹함과 비탄함에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이들이 겪었던 가해자를 향한 혼란한 감정과 헤어나올 수 없는 무력감에 대해 지금껏 무지했던 현실, 그리고 그로 인해 피해자의 형태를 납작하게 인식했던 실수가 이 책의 제목인 ‘비밀’이 가리키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판옌중에게 우신핑은 온갖 비밀로 가려진 인물이었다. 아내에 대해 알고 있었던 사실 중 무엇 하나 진실인 것이 없었기에 배우자로서의 신뢰를 저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은폐를 지금껏 우리가 성폭력 피해자들의 표면에 덧씌운 베일에 견주어 보면 결코 섣부르게 지탄할 수 없다. 소설에 등장하는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비밀로 만들었던 것은 우리의 모순된 시선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한 사람을 보호하고 싶을 때 그 사람을 어리석고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꾸밉니다. 그들이 동정을 얻기 쉽도록 말이지요. 동시에 그 사람의 개성을 빼앗습니다. 저는 성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가련한 여자, 나쁜 남자,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에서 벗어난 이야기를요.”
우샤오러,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작가 인터뷰 '벼랑 위의 낙원', p.443
